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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병×·벙어리장갑·결정장애…이 말은 누구를 아프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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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혐오표현을 돌아본다

정치인·미디어 혐오 표현 남발

성장기 청소년들에게 악영향

학교에선 언어 감수성 키우기 수업

아이들 욕설·혐오 표현 줄어들어

토론회·서적 출판도 잇따라

정부에서도 순화 운동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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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 미디어를 통해 혐오 표현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면서 급기야 방송통신위원회·여성가족부 등이 언어 순화 캠페인에 나섰다. “마음을 표현하는 말, 생각을 보여주는 글,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하는 청소년이 대한민국을 밝게 한다”는 내용이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자막으로 지나간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혐오 표현들이 늘어나는 것도 심각하지만,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습관 속에 칼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넌 몇 학번이야?”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가리키면서 거기, 다문화, 나와 보라는 거야. 순간 당황했는데, 선생님이랑 애들이 다 나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왜요, 그 말이 어때서요?>(동녘) 중에서)

학교에서 기분 나빴던 일을 이야기하는 딸 때문에 속상해하던 몽골 이주 여성의 사례만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이 뭐가 잘못됐나 혼란스러울 것이다. <왜요, 그 말이 어때서요?>의 지은이 김청연씨는 “실제 학교 현장에서 다문화 가정 자녀를 두고 비하 발언을 하거나 대놓고 차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최근 학생들 사이에서 다문화 가정을 ‘다문화’로 줄여 부르며 은근히 깔보는 문화가 퍼져 있다”고 전했다.

김 작가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지만 듣는 사람의 감수성을 다치게 하는 또 다른 사례를 소개했다. “넌 어느 학교 다녀? 몇 학번이야?” 기본 정보를 알고 싶었던 단순한 생각이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중학교 동창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시는 네 대학 친구들 모임에 나 부르지 마”라는 친구의 말은 지금까지 마음 한쪽을 서늘하게 한다.

최근 몇몇 정치인이 정쟁을 벌이며 쏟아낸 “병× 같은 게” “벙어리가 돼버렸다” “정치권에 정신장애인들이 많다” 등의 발언에 장애인권익단체는 수차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결정·선택 못하면 장애

장애인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없이 썼던 벙어리장갑이 2013년 한 사회복지법인의 캠페인에 따라 엄지장갑, 손모아장갑이라는 말로 다시 태어난 것은 남의 상처를 습관처럼 사용하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김청연 작가는 “결정장애, 선택장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결정이나 선택의 기로에 서서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경우를 장애로 보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위험수위에 올랐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문제 제기를 하고 단어 사용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 자체는 긍정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혐오 표현이 그 어느 때보다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이를 진단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토론회나 학술행사도 많이 열리고 관련 서적도 많이 출판되는 등 언어습관을 환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특히 일선 학교에서도 캠페인을 벌이거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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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 주제로 융합수업

서울 관악중학교에서는 도덕, 국어, 사회 시간에 융합수업을 진행해 학생들 주도로 혐오 표현을 대항 표현으로 바꾸는 등 학습효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해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혐오 표현 안 쓰기 프로젝트’를 주도한 구본희 교사는 “한 학기 만에 선생님들이 감동할 정도로 교실과 복도에서 욕설과 혐오 표현이 줄었다”고 전했다.

이 학교에서는 도덕 시간에 인권 개념을 알아보고, 현실에서 마주하는 혐오 표현 관련 모둠 토론을 통해 대항 표현 찾아보기를 한다. 국어 시간에는 자신의 언어생활을 녹음해 되돌아보는 글을 써본다. 이 시간이면 학생들은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상처받았던 경험을 떠올린다. 또 주로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단어를 썼을 때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도 있고 친구나 타인을 혐오하고 차별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회 시간에는 방송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표현을 비판적으로 평가해보는 수업을 진행한다.

국어 과목을 맡은 구 교사는 수업 시작 10분 전에 늘 아이들에게 책을 읽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한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혐오 표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들을 주로 읽혔다.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별로 책 선정도 달리했다. 단계별 혐오 표현 관련 책을 다 읽은 학생들을 위해 여성, 장애, 이주노동자 등을 주제로 한 다양한 책을 읽게 했다.

그리고 학년이 끝나갈 즈음 복도에서는 더 이상 큰 목소리의 욕설이 들리지 않았다. “친구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가도 금세 스스로 입을 막거나 옆 친구의 지청구에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는 구 교사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주체적이고 비판적으로 미디어를 접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혐오 문제를 사회 문제와 관련지어 고민하는 자세를 기르게 하면 조금씩 더디게라도 민주시민으로 자랄 것”이라고 했다.

언어 감수성 높여주는 책

혐오 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되는지 사회문화적 배경을 곁들여 설명해주는 책들이 다양하다. 아래 소개된 책 중에는 구본희 교사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권한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예민해지라”고 주문한다는 것이다. “웃자고 얘기하는데 왜 죽자고 달려드느냐”는 항의에는 단호해야 하며 일상적이고 관용적으로 쓰는 말이라도 사소하게 넘어가지 않는 예민함이 곧 관계의 소통을 원활히 해준다고 조언한다.

“혐오 표현을 종합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 단행본”으로 소개되는 <말이 칼이 될 때>(홍성수·어크로스),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시작”이라고 강조하는 <언어의 줄다리기>(신지영·21세기북스),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선량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차별과 혐오의 순간’을 포착한”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창비), “가족 호칭, 직업 명칭, 반말과 존댓말 등에 있는 한국어의 차별적 속성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저자의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배윤민정·푸른숲), “남성의 언어, 강자의 언어, 체제의 언어를 겨눠 주류 언어의 모순을 짚어내고 차별과 편견을 허무는 평등한 언어 사용 설명서” <말이 세상을 아프게 한다>(오승현·살림프렌즈), “혐오 표현도 표현의 자유일까”라는 화두를 던진 <인권도 차별이 되나요?>(구정우·북스톤) 등이 있다.

정희경 기자 ahyun0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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