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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할머니께 전하지 못한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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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용샘의 학교 도서관에서 생긴 일

한겨레

얼마 전, 식당에서 젊은 여성에게 인사를 받았습니다. 젊은 여성은 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을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수은이였습니다. 5년 전, 중학교 도서부였던 수은이는 제 기억에 깊이 자리한 학생입니다.

수은이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도서부가 된 이유는 지도교사인 제가 자신의 처지만큼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육아휴직 뒤 복직한 그해는 사고 잦은 학급의 담임까지 맡아 적응하기 참 어렵더군요. 수은이도 많은 형제 사이에서 어려워하는 친구였습니다. 동병상련의 정으로 도서부에 들어왔다는 첫인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해 도서부가 추구하는 가치는 손과 발로 책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만 느끼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느끼고 배운 것을 실천하기로 했지요. 2014년 이후 실천하는 독서는 제게 중요한 가치가 되었지요.

그해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나 같은 늙은이 찾아와줘서 고마워>라는 것이었습니다. 홀몸노인 열두 분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지요. 평소 읽고 토론하는 시간에 잘 나서지 않던 수은이가 책을 본 뒤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분이 있을까요?”

수은이의 질문은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민자치센터에 전화해서 홀몸노인에 대해 여쭸습니다. 당연히 혼자인 분들은 많이 계셨지요. 도서부는 책의 저자처럼 주변에 외로이 계시는 어르신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학생들은 걱정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에 대한 두려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치 있는 일에 참여한다는 설렘이었지요. 사실 저도 긴장이 되긴 했습니다. 저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며칠 뒤 하굣길에 학생들과 함께 할머니에게 필요한 쌀, 라면, 주전부리를 사서 할머니 댁으로 향했지요. 필요한 것은 책이 알려주었습니다. 도서부 학생들은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에서 필요한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루에 한 끼를 드신다는 할아버지가 배고프다는 이야기에서 쌀을 사자는 식의 논의 과정이 있었지요. 주민자치센터에서 소개해 준 할머니에게 사전에 연락을 드리고, 찾아뵈었지요.

꽤 후미진 골목 끝에 할머니 댁이 있었습니다. 책에서 읽었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배고픔보다 외로움이 가장 크다고 했지요. 우리가 만난 금순 할머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도서부 학생들은 2시간 동안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과일과 과자를 함께 먹으며 좁은 방을 이야기와 온기로 꽉 채우고 왔습니다.

수은이는 전기장판이 고장 난 것이 자꾸 신경 쓰였나 봅니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한쪽에 말린 전기장판이 고장 났다는 할머니 말씀에 이따금 전기장판에 눈을 돌렸지요.

할머니와 따뜻한 포옹을 하고 난 몇 달 뒤, 수은이는 토요일 오후에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선생님, 할머니가 댁에 안 계셔요.” “응?” “금순이 할머니가 안 계신다고요. 집이 텅 비었어요.”

할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할머니는 떠나셨지만, 수은이는 집에서 쓰지 않는 전기장판과 ‘토요 방과 후 수업’에서 만든 케이크를 들고 혼자 할머니 댁에 찾아간 것입니다.

책 읽기를 싫어하던 수은이는 어느새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훌쩍 자라서 함께 있던 남자친구와 인사를 합니다. 식당 옆에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케이크를 하나 사서 선물했습니다. 혹시 수은이도, 그날 할머니에게 선물하지 못한 케이크를 떠올렸을까요?

한겨레

황왕용
광양백운고 사서 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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