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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의 현장… 빈 집 활용한 갤러리마다 그 날의 기억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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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자박 소읍탐방] 전남 해남 우수영마을과 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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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타워에서 본 명량해협. 오른쪽 교각 아래가 물살이 가장 센 지점이고, 그 주변이 우수영관광지다. 전라우수영은 두 교각 사이의 섬(양도) 뒤로 보이는 마을이다. 해남=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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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울음, 그건 흡사 나무 대문을 천천히 밀칠 때 나는 삐걱거리는 마찰음 같고, 한여름 늦은 오후 뭉게구름 속에 감춰진 우렛소리 같았다. 울돌목의 물 울음소리는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 좁은 해협을 강물보다 빠르게 흐르던 바닷물은 진도대교 아래에서 물거품을 일으키며 뒤집어진다. 암초에 부딪혀 역류하던 바닷물이 물속에서 폭탄이 터진 듯 수면에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며 솟구쳐 올라 소용돌이친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 130여척을 격퇴한 명량해전의 현장이다.


◇조선을 구한 전쟁, 명량해전 그리고 울돌목

명량해협(鳴梁海峽) 또는 울돌목은 해남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 군내면 녹진리 사이 약 1.5km 바닷길이다. 폭이 가장 좁은 곳은 약 300m로 6시간 간격으로 물때가 바뀔 때마다 조류가 빠른 속도로 남해와 서해로 교차한다. 울돌목 현장 안내판에는 통상 유속이 7~10노트이며, 지금까지 관측된 최고 유속은 13노트(시속 24km)였다고 적혀 있다. 해군 충무공리더십센터는 명량해전이 발발한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엔 오전 8시48분경 최고 9.7노트(17.9km)의 북서류(밀물)가 흘렀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이날 오후 12시30분경 조류가 바뀌는 틈을 이용해 총공격을 퍼부어 왜군을 무찌른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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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 아래 울돌목.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바닷물이 뒤집어져 소용돌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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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 아래 명량해협 물살은 강물보다 빠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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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협 해남 쪽 바닷가는 우수영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관 뒤로 명량대첩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해안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성벽 형태로 쌓은 방파제 바깥 바다에는 ‘고뇌하는 이순신상’이 물 흐름을 응시하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이순신 동상이 칼과 갑옷을 입고 있는 것과 달리 도포 차림에 지도를 든 모습이어서 유난히 돋보인다. 해남 출신 조각가 이동훈씨가 2008년 10월 명량대첩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했다. 높이 2m, 폭 65㎝로 실물 크기에 가까워 결전을 앞둔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느끼게 한다. ‘고뇌하는 이순신상’은 바다 건너편 진도에 세워진 대형 이순신 동상과 마주보고 있다. 산책로는 물살이 가장 센 이곳 해안을 돌아 뒤편 산자락으로 이어져 ‘강강술래길’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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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울돌목 해안에 ‘고뇌하는 이순신 상’이 설치돼 있다. 맞은편 진도 해안의 대형 이순신 동상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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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온 학생들이 해남 우수영관광지 해안 산책로로 이동하고 있다. 바다 건너 산꼭대기에 보이는 것이 진도타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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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타워에서는 명량해협과 주변 지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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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실감하기에는 이곳 진도대교 아래가 으뜸이지만, 명량해협 전체 지형을 파악하려면 진도대교 건너 진도타워에 올라야 한다. 우수영관광지 맞은편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아 진도대교를 중심으로 한 바닷길과 주변 지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우수영관광지는 진도대교 북단 울돌목에 위치하지만, 실제 전라우수영은 관광지에서 북측으로 약 2km 떨어진 바닷가 마을로, 현재 문내면 소재지다. 진도타워에서는 진도대교 뒤로 보이는 마을이다.

◇빈집마다 들어찬 명량대첩 신화…우수영문화마을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으로 표시되는 지도에 익숙한 탓에 전라우수영이 왜 전라도 서쪽 끝에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기준은 임금님이다. 한양에서 보면 해남은 전라도 오른쪽 끝자락이고, 이곳 해군 기지가 전라우수영인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런 이유로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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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문화마을 초입 담장에 이순신과 명량해전을 표현한 대형 그림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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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택 외관이 이순신의 시 ‘서해맹산(誓海盟山)’으로 장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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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우수영 성곽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지만,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돌담처럼 보이는 성곽 옆에 날개 장식의 벤치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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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요충지로서 전라우수영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우왕 3년(1377) 무안 당곶포(현 함평)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을 설치한 것이 시작이었다. 조선 세종 22년(1440)에 기지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세조 11년(1465)에는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했다. 성종 10년(1479) 순천 내례포(현 여수)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으로 칭하게 된다.

‘전라우수영지’에 의하면 전라우수영은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에 이르렀다. 영내에 민가가 620호나 있었고, 1,085명의 병력이 주둔했다. 돌과 흙으로 쌓은 영성(營城)이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고종 32년(1895) 우수영이 폐쇄되면서 성의 흔적도 희미해졌다. 현재는 민가가 없는 북측 산자락에만 일부 형체가 남아 있다.

우수영은 사라졌지만 500여년 국토의 서남해안을 지켜 온 해군기지, 명량대첩의 영광은 ‘우수영문화마을’ 프로젝트로 되살아났다. 젊은 사람을 찾아 보기 어렵고, 남은 주민들과 속절없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우수영마을이라고 다를 게 없다. 해남군은 낡아 가는 우수영 10개 마을에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해 지난 2017년 사업을 마무리했다. 빈집과 낡은 담벼락을 활용해 회화, 조각, 영상 미디어, 공예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설치했다. 작품 하나하나가 단순히 골목을 산뜻하게 단장한 ‘벽화마을’ 수준을 뛰어넘는다. 빈 집을 활용한 갤러리마다 ‘오늘만 공짜’라는 팻말을 달고 있지만, 공짜로 누리기 미안할 정도의 작품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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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여관을 활용한 ‘정재’ 카페. 요즘은 콩국수를 주로 팔고, 날이 선선해지면 팥국수를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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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카페 내부의 이순신 미디어 전시실. 외관은 허름해도 전시물은 첨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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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기증한 생활용품을 전시하고 있는 ‘정재’ 카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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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 포구 앞 이순신 장군의 초상과 명량해전 장면을 재현한 담장 그림이 출발점이다. 이곳에서 골목으로 이동하면 우수영마을을 소개하는 ‘갤러리 아카이브’와 ‘갤러리 만화’ ‘생활사 갤러리 정재’가 차례로 나타난다. ‘정재’는 부엌을 뜻하는 지역 언어로 식당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서울로 치면 신라호텔이었다는 ‘제일여관’ 내부를 전시실로 개조했다. 입구에 짚을 활용한 다양한 생활 도구가 걸려 있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좁디 좁은 여관방마다 개성 넘치는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이순신과 관련한 미디어 전시실, 초등학교 교실을 주제로 꾸민 방, 지역의 병영 문화에서 유래한 ‘용잽이 놀이’를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도 들어 있다. 낡은 건물 외관에 비해 전시 작품은 최첨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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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마을에는 빈집을 활용한 갤러리가 9개 있다. ‘오늘만 공짜’라고 적어놨지만 언제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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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 작품이 설치된 ‘갤러리 1597 우수영’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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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1597 우수영’의 설치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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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면립상회’ 내부의 설치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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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포함해 우수영마을에는 빈집을 활용한 특색 있는 전시실이 9개나 있다. 포목상회와 목공소가 있었던 건물에는 ‘갤러리 면립상회’로 설치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고, 복덕방이었던 건물에는 마을 주민들의 덕담을 나눠 주는 자판기가 설치됐다. 장터 어귀의 ‘갤러리 수다방’에는 지역 사투리를 새긴 타일 작품을 전시했다. ‘갤러리 1597 우수영’ 건물은 부엌과 방을 이순신과 명량해전, 강강술래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꾸몄다. 도심의 번듯한 미술관에 놓아도 손색없을 작품이지만 찾는 이가 거의 없어 안타깝다.

‘정재’ 카페 부근에는 법정(1932~2010) 스님 생가 터도 있다. 잡초가 무성한 공터에 푯말만 세워 놓은 상태다. 무리해서 생가를 복원하기보다 ‘무소유’를 실천한 스님의 정신을 살려 이대로 두어도 좋겠다는 느낌이 든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옛 우수영초등학교 운동장에도 법정을 추억하는 작품이 놓여 있다. 이 학교 25회 졸업생인 그의 사진에는 당돌하게도 ‘스님’이 아니라 ‘법정 선배님께 길을 묻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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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문화마을의 법정스님 생가 터. 작은 푯말만 하나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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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우수영초등학교 교정의 법정 스님 사진에 ‘선배님’이라고 쓰여 있다. 법정은 이 학교 25회 졸업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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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터 근처 커다란 바위 암반에는 우여곡절 끝에 제자리를 찾은 명량대첩비와 충무사가 자리 잡고 있다. 숙종 12년(1686) 예조판서 이민서가 비문을 짓고,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라 비명을 쓴 명량대첩비는 1688년 3월에 건립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2년 일본인 경찰이 뜯어내 서울로 옮겼고 그 과정에서 비각이 파손되는 수난을 겪었다. 조선총독부가 ‘반시국적 고적’으로 정의하고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파묻어 버렸던 비는 광복 후 발견돼 1947년 해남으로 돌아오게 된다. 1950년 우수영에서 500m 떨어진 학동리 언덕에 비각과 함께 재건됐다가 2011년 애초의 위치인 문내면 동외리 952-2번지로 옮겨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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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앙 커다란 암반 위에 자리 잡은 명량대첩비와 비각. 일제강점기 서울로 ‘압송’되는 수난을 당했다가 2011년에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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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루에 오르면 우수영마을과 다도해 풍경이 평화롭게 보인다. 망해루 주변에 전라우수영 성곽이 일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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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 성곽은 마을 주택가 몇몇 지점에 흔적이 남아 있지만, 누가 일러주지 않는다면 알아보기 어렵다. 대신 마을 북서쪽 망해루에 오르면 석축에 흙으로 덮인 성의 윤곽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바다를 조망하는 곳, 망해루에 오르면 우수영마을 뒤편으로 주작산ㆍ두륜산ㆍ달마산으로 이어지는 다도해 능선이 겹겹이 포개진다. 섬과 산으로 둘러싸인 바다는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롭다.

해남=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