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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한겨레 프리즘] 벌써, 2119년이 설렌다 / 유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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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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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이 질문을 받거나 던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답은 천차만별일 것이 틀림없다. 누군가는 극 중 대사 한마디가 가슴에 꽂힌 작품을, 누군가는 가장 좋아하는 감독의 마스터피스를, 누군가는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한 영화를 꼽을지도 모른다.

‘개인이 인생 영화를 꼽는 것처럼 전문가들이 모여 지난 100년간 주목해야 할 영화 100편을 뽑으면 어떨까?’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은 올해, 영화 담당 기자로서 떠올린 생각이었다. 지난 15일 시작한 기획 연재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은 그렇게 ‘천진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준비 과정은 꼼꼼하고 철저했다. 공정성을 갖추기 위해 석달에 걸쳐 감독·제작자·프로그래머·연구자·평론가 등 영화계 전문가 38명이 참여하는 선정위원단을 꾸렸고, 1919년부터 2018년까지 1400여편의 기초 목록을 바탕으로 두차례의 100편 선정 작업을 했으며, 세차례 오프라인 회의도 열었다. 결국에는 동수 득표를 한 작품을 놓고 투표까지 거쳐 ‘최종 100선’을 선정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엄두가 안 나 시도조차 못 한 기획”이라며 부러움 깃든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나는 내내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였나’ 하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선정위원단 첫 회의부터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 ‘시대별 안배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 감독 영화가 빠진 이유가 뭐냐’는 등 온갖 ‘우려’와 ‘시비’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한 선정위원은 “1970년대 이전 영화 중 중요한 작품이 여럿 빠진 최종 결과에 동의할 수 없다”며 사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모두가 100% 동의하는 한국영화 100선 선정은 불가능하다”는 변명을 당당히 앞세웠지만, 사실 속으론 리스트에 허점은 없는지 헤아리며 한없이 걱정했다.

그러나 기사를 쓰기 위해 미처 보지 못했던 고전 영화를 찾아보고, 이미 보긴 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 근래 영화를 돌려 보며 생각지 못했던 희열과 맞닥뜨렸다. 그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우리의 삶을 영화라는 창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는 경험이었다. <오발탄>(1961)에 비친 전쟁과 근대의 빈곤한 그늘을, <바보들의 행진>(1975)에 어린 1970년대 유신독재와 검열의 그림자를, <바보선언>(1983)에 담긴 군부독재와 물질만능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대면하는 것은 마치 내가 살아내지 않은(혹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시간여행과 같았다. 그리고 그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한국영화가 100년 동안 이룩한 미학적·기술적 성취까지 더듬으며 자부심과 뿌듯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번 기획을 통해 독자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면….’ 100선이 무엇인지보다는 100선을 통해 무엇을 볼 것인가에 더듬이를 세우자 차츰 그동안의 자괴감과 걱정의 농도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이 글을 쓰는 동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칸이 보낸 한국영화 100돌 축하 선물처럼 느껴진다. 한국영화의 또 다른 100년에 대한 기대감도 한껏 높아진다. 이번 한국영화 100선에 올리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기생충>은 아마 먼 훗날 다시 꼽을 100선을 장식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이 영화를 통해 ‘2019년의 한국’을 읽어내게 될 터다. 그렇게 낯선 시대와 조우하는 길을 터주는 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다.

뱀발: 지난 3월, 선정위원 한명이 <기생충>을 리스트에 올리고 “선정 기간을 2018년이 아닌 2019년까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영화를 먼저 본 그는 <기생충>이 ‘큰일’을 낼 작품임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것이다. ○○○ 평론가님, 당신을 한국영화계 ‘공식 무당’으로 임명합니다!

한겨레

유선희
문화팀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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