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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매경의 창] 대통령의 포용정치 리더십과 폴로어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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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문재인 대통령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와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행사를 보면서 한국 정치를 생각해 본다. 문 대통령은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국민에게 눈시울 붉히며 미안함을 표하고 정부수반으로서 진솔하게 사과했다. 겸손과 탈권위는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두 지도자의 공통점이었다. 그 바탕 위에 포용국가 정치 리더십이 새롭게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들은 새 정치를 토의하는 공론장으로 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주위 참모들과 토론을 즐겼다. "계급장 떼고 이야기해보자"고 대드는 바람에 보좌진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2004년 1월 초 청와대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의 취임 1주년 신년 언론회견을 준비하는 회의에 나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 2명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그가 '탈권위'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내심 무언가 좀 다듬을 기회가 왔다고 마음먹었다.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2003년 3월 초 평검사들과 공개 토론을 벌였던 일이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 개혁과 인권을 얘기했다면 검사들은 그의 주변 문제와 확인되지 않은 청탁 전화를 파고들며 '맞짱토론'으로 몰아갔다. 탈권위와 토론의 자유는 예의와 양식이 수반되지 않으면 방종과 오만이 판칠 뿐임을 입증했다. 사후 여론을 보더라도 양쪽이 모두 손상을 입었다. TV 생중계에 비친 대통령의 모습은 위신을 잃었고, 검사들은 무례하다는 평가를 재확인받았다.

그럼에도 탈권위에 대한 그의 소신은 확고했다. "권위, 권위주의는 다 버려야 합니다. 탈권위의 새 시대로 가야 합니다." 이에 나는 조심스럽게 탈권위 구분론을 폈다. "권위를 무조건 다 버린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국민 다수 유권자가 만들어 준 정당한 권위를 갖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정통성입니다. 국민이 부여한 정당한 권위를 활용해 국리민복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책무 아니겠습니까." 그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 뒤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권위는 안됩니다. 모든 권위는 다 나쁜 것입니다." 그의 뚝심 있는 탈권위 철학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참여민주정치에 대해 "아무리 많은 시민이 광장에 모여도 대의정치 제도인 의회 의결을 넘어설 수 없다"고 하자 그는 불만 어린 얼굴이었다. 국회 의결 못지않게 광장 시민들의 의사와 국민여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투표자로서 국민(the people as voters)' 못지않게 '공동체로서 국민(the people as community)'이 중요하다는 직접민주정치 이론의 핵심이 그것이다. 선거 왜곡현상이나 의원의 일탈과 같은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이론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5·18 광주 기념사 중 한 대목이 야당과 일부 언론의 시빗거리다. "… 같은 시대, 같은 아픔을 겪었다면, 민주화의 열망을 함께 품고 살아왔다면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이 대목이 야당을 독재자의 후예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 일련의 조건부 가정법식 어법이었지 규정하는 맥락은 아닌 것으로 읽힌다.

독재정권의 집권당 출신 중에도 1969년 3선개헌이나 1972년 유신체제를 거부하다가 출당당하고 고초를 겪은 인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2012년엔 그 내부에서 "독재자의 딸이 어떻게 대통령 출마냐"며 반대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철학과 역사의식을 지키면 독재자의 후예로 규정될 이유가 없다. 5·18 광주에 대한 입장도 그런 잣대가 될 수 있다. 국회의 여야 합의 입법과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는 망언을 한다면 스스로 독재자 후예로서 정체성을 고수하는 셈이다. 문 대통령의 가정법식 문장은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호소와 촉구성에 가깝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미래는 겸손과 탈권위, 그리고 새로운 포용정치 리더십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폴로어십 문화에 의해 좌우된다.

[김재홍 서울디지털대 총장·공익사단법인 정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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