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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싸우는 여자, 무시무시한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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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캡틴 마블’로 소녀들의 롤모델로 떠오른 브리 라슨, 히어로 의상 벗었을 때도 관성 깨는 행동력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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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차세대 톰 크루즈가 아니에요. 그냥 저죠, 첫 번째의.”(No, I’ll be the first me, not the next Tom Cruise.)

어벤져스 군단의 새 멤버, ‘캡틴 마블’ 역의 브리 라슨은 영화 속 액션 장면을 대역 없이 직접 했다고 <엔터테인먼트 투나이트>(미국 연예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중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토르 역의 배우 크리스 햄스워스가 “오, 톰 크루즈가 여기 온 건가”라고 얼버무리며 끼어들자, 라슨은 그런 방식의 비교가 마뜩지 않다는 듯 즉각 똑 부러지게 받아친다. 한동안 소셜네트워크에서 화제가 되었던 라슨의 태도는 예고편부터 서로 견제하는 토르와 캡틴 마블의 캐릭터 설정일 수도, 조금 신경질적인 과민반응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의 노력과 성취를 늘 절대적인 남성의 이름 다음 자리에 줄 세우려는 낡은 관성을 즉각 시정하겠다는 투지로 읽히기도 한다. 이 짧은 발언에서 바로 알 수 있듯, 브리 라슨은 싸우는 여자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다시 싸우는



4월24일 개봉하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2008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지난 10년간 구축한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마블코믹스에서 시작한 마블 히어로들의 영화적 세계관, 이하 MCU) 총 22편의 작품을 집대성하는 장장 상영시간 3시간2분의 피날레다. 인류의 반, 아니 우주 생명체의 절반이 먼지처럼 사라진 ‘인피니티 워’ 에서 생존한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호크아이, 블랙위도 등이 최강 악당 타노스에 맞서는 이 끝장 게임의 가장 강력한 변수는 닉 퓨리가 마지막 순간 호출한 숨겨진 히어로, 캡틴 마블이다.

지난 3월 개봉한 <캡틴 마블>은 크리족 전사 비어스가 캐럴 댄버스라는 지구의 또 다른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누군가에게 억제당했던 자신의 진짜 힘의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때론 벅차고 대부분 통쾌한 이 영화는 여자란 원래 감정적이고 약한 존재라는 선입견 속에 무시받고 쓰러진 기억이 있는 전세계 여성들을 열광적으로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달리고, 다시 싸우는 캡틴 마블은 소녀들의 새로운 롤모델로 떠올랐다. MCU 솔로무비 중 최초로 여성 히어로를 내세운 <캡틴 마블>은 국내에서만 관객 약 570만 명을 동원했고, 전세계에서 10억달러(약 1조1천억원)를 벌어들였다. 마블 솔로무비 중에서는 <블랙 팬서> <아이언맨3>를 잇는 톱3의 스코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홍보차 4월13일 서울을 방문한 브리 라슨은 광장시장 아주머니가 먹여주는 ‘마약김밥’을 야무지게 받아먹으며 선거철 정치인도 울고 갈 만큼 한국 관객 민심 잡기에 성공했다. 며칠 뒤 열린 아시아 프레스 콘퍼런스에서는 “타노스(조시 브롤린)는 겁을 좀 먹어야 될걸요”라는 말로 최강의 적을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10년 전 MCU를 열었던 첫 번째 히어로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가장 최근 선보인 여성 히어로 캡틴 마블의 브리 라슨이 나란히 선 무대는 그 자체로 시대의 변화와 MCU의 세대교체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현재는 여성들이 우리가 진작에 가졌어야 할 선두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한발 앞으로 나아가 싸우는 시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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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의 변화가 필요하니까요”



브리 라슨은 몸을 덮은 히어로 의상이 이 영화 촬영 때만 입고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 배우에게 부여된 사회적 임무이자, 자신에게만 허락된 독보적 영향력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변화부터 찾아나갔다. 백인 남성이 대부분인 인터뷰 기자단 구성을 다양한 인종과 성별, 소수자, 장애인으로 넓혀나갔고, 홍보나 화보 촬영 때 입는 의상의 디자이너 성비 역시 균등하게 맞춰나갔다. “만약 나란 사람에게 일종의 특권이 생겼다면, 지금 당장 쓰고 싶어요. 계좌에 저축해놓고 더 늘어나길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에겐 지금 당장의 변화가 필요하니까요.”

‘미투’ 캠페인의 분수령이 된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대학 내 성폭력 생존자들의 투쟁 기록인 다큐멘터리 <더 헌팅 그라운드>의 주제가를 부른 레이디 가가와 함께 실제 성폭력 생존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성폭력 피해 여성을 연기한 영화 <룸>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라슨은 무대 옆에서 그녀들의 퇴장을 기다렸다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악수를 청하고 뜨겁게 포옹했다. 그러나 다음해의 온도는 확연히 달랐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남우주연상에 호명된 케이시 애플렉의 시상자로 나온 라슨은 결과 발표 외에는 어떤 축하도 포옹도 하지 않고 박수도 쳐주지 않은 채 무대를 내려왔다. 케이시 애플렉은 당시 <아임 스틸 데어>를 촬영할 때 여성 스태프 두 명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세계여성콘퍼런스 ‘우먼 인 더 월드’와 한 인터뷰에서 라슨은 “당신 뒤에 올 여성들을 위해, 미래의 당신을 위해 지금의 일을 선택해나가라”고 말한다.

6살 때부터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아이. 이혼 뒤 캘리포니아로 이사해 딸을 결국 배우로 만들어낸 엄마의 노력을 라슨은 “싱글맘의 기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일찍 배우 생활을 시작했지만 ‘특출나게 예쁜 것도 개성 있게 못생긴 것도 아닌’ 외모로 인해 수많은 거절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내 실패가 모든 여성의 실패가 될 거라고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만들어지는걸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10억 번은 실패했기 때문이에요. 그런 실패의 경험을 스크린으로 불러오는 게 중요했고요.”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고 연출작으로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멈춰진 유년의 심장에 심폐소생을 시키는 사랑스러운 장편 연출작 <유니콘 스토어>는 현재 넷플릭스로 볼 수 있다.

담력과 유머 그리고 약간의 똘끼



이 배우를 영화 안팎으로 연구하며 떠오르는 단어는 ‘담력’이다. 담력과 유머 그리고 약간의 ‘똘끼’로 자신의 삶을 채워가는 브리 라슨.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들 역시 대부분은 고난 속에 던져지지만 ‘겁 없고 용감한 기운’으로 끝까지 살아남는다. <룸>의 자매판 같은 <숏텀 12>의 그레이스는 아버지의 성폭행으로 임신까지 했던 끔찍한 기억을 안고서도 청소년 위탁소에서 일하며 아이들의 상처를 진심으로 껴안는다. 영화 <프리 파이어>는 서로 죽을 때까지 총질하는 것으로 1시간30분의 상영시간을 꽉 채운 실험적인 영화다. 라슨은 남자들이 모두 전멸한 뒤 마지막에 돈가방을 들고 살아 나온다. <콩: 스컬 아일랜드> 같은 액션 블록버스터에서도 그녀는 비극의 희생자로 처연하게 사라지지 않고, 의연하게 그 지옥을 탈출한다. 담력이란 공포와 위협 없는 평화의 땅에 피는 연약한 꽃이 아니다. 공포와 싸우고 위협을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길러진, 쉽게 꺼지지 않는 근육이다. 브리 라슨은 싸우는 여자다. 담력의 근육을 쉬지 않고 ‘벌크업’ 중인 무시무시한 생존자다.



이 배우의 비트/ 영화 <룸>, 조이의 왼팔







최선의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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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2015)은 배우 브리 라슨에게 영국 아카데미, 미국 배우조합상, 골든글로브, 오스카를 포함해 50개 넘는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던 영화다. 촬영 당시 스물다섯의 브리 라슨과 여덟 살 배우 제이콥 트렘블레이가 만들어내는 숨 막히는 앙상블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연기가 생물학적 나이와 경험으로 축조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라슨이 연기하는 조이는 열일곱 살에 한 남자에게 납치된 뒤, 좁은 방에 7년 동안 감금된 채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하며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된다. 실패를 거듭하는 탈출, 무기력한 절망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조이는 어느덧 다섯 살 생일을 맞은 아들 잭을 보며 이 ‘룸’에서의 삶을 더는 지속할 수 없다고 결심한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알지? 에드몽이 어떻게 그 섬에서 탈출했지? 죽은 친구 대신 가방에 들어가서 죽은 척하고 가만 누워 있었지? 너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카펫에 돌돌 말린 상태로 죽은 척하고 있으면, 납치범이 주검을 처리하기 위해 픽업트럭에 태울 것이고, 차가 정지선에서 멈추면, 뛰어내려서 도움을 청한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을 아들에게 설명할 때 배우 브리 라슨은 왼쪽 팔을 오른쪽 어깨에 올린다. 스스로를 포옹하듯 지탱하는 이 동작은 아들에게 이 방 밖에 ‘진짜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전 장면에서도 똑같이 반복했던 행동이다. 잭이 태어나기 전 홀로 지낸 2년간, 스스로를 팔로 안아가며 버텼던 습관처럼 보인다.

탈출을 말로 설득하고 몸으로 훈련하는 3분30초가량의 비트 속에 라슨은 비장함이나 애절함을 섞지 않는다. “하기 싫어!” “엄마 미워!!”를 외치는 아이에게 혹독한 훈련에 들어간 운동 코치처럼 담담한 말투로 동작과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시킬 뿐이다. “정지 표시에 트럭이 설 거야. 트럭이 서면… 이제 몸을 돌려, 돌려, 돌려, 나와! 그리고 점프! 아무나 보면 소리를 질러, 우리 엄마가 조이 뉴섬이에요.”

지난한 반복훈련이 끝난 후 납치범이 방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엄마와 아들은 세상을 보는 유일한 통로였던 천장으로 난 작은 창을 향해 나란히 눕는다. 그리고 조이는 스스로를 굳게 감싸고 있던 왼쪽 팔을 풀어 잭을 안는다. 어쩌면 마지막 포옹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 작은 ‘룸’ 안에서 줄 수 있는 게 이 왼팔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는 한 평짜리 작은 영화 공간에서 배우가 만들어낸 물리적으로 최장의, 심리적으로 최선의 도구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백은하 배우연구소(@ una_labo)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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