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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워킹맘의 죄책감과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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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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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엄마 잡학사전-84] 5세된 첫째가 유치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초등학교 강당에서 꽃다발을 들고 찍은 사진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경쟁사회에 첫걸음을 내딛는 것만 같아서였다. 아이가 다니는 기관의 관할 부처가 보건복지부에서 교육부로 바뀐 것이 이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어린이집과 달리 유치원에 보낼 때는 고민이 많았다. 선택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국공립 유치원, 사립 유치원, 영어 유치원, 숲 유치원, 놀이학교, 유아체능단 등이다. 비용도 천차만별이었고 가르치는 것도 조금씩 달랐다. 유치원을 어디로 보내느냐에 따라 아이의 앞길이 결정이라도 되듯 밤마다 고민했고 답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한 달에 수백만 원에 달하는 영어유치원과 사실상 무료나 다름없는 국공립 유치원, 그 사이에서 절충안처럼 자리한 사립유치원은 부모의 재력을 줄이라도 세우듯 잔인하게 가격표를 내밀고 있었다. 효과야 어떻든 비싼 유치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제한된 월급에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영어유치원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어유치원에 보내면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해 영어를 까먹지 않게 해줘야 하고, 이후에는 특목고에 진학할 수 있도록 부모가 계속 발 벗고 뛰어야 한다'는 지인의 말에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영어 유치원이야 그렇다 쳐도, 대학에 진학하기도 이전에 1년에 1000만원 상당이 들어가는 사립초등학교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랴. '두 아이 모두 동등하게 대하자'는 생각으로 첫째의 영어 유치원행은 과감히 포기했다.

남은 선택지는 국공립 유치원과 사립 유치원 두 개였지만, 인근 사립유치원은 비리에 휘말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인구밀도도 높아 아이들끼리 복도에서 수시로 어깨가 부딪힐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떨어지면 어린이집에 1년 더 보내자는 생각으로 국공립 유치원 한 곳만 지원했고 다행히 '대기 1번'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6일 입학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고서도 고민은 계속됐다. 태권도, 피아노, 발레, 영어 등 다양한 사교육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갈 때까지 한글이나 영어를 다 학습해야 된다는 압박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건만, 예체능은 별개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가 맞벌이다 보니 아이가 유치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 지루해할까봐 뭐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가장 손쉽게 보낼 수 있는 태권도의 경우 무료로 3회 수업을 들어본 후 아이가 관심 있어할 경우 등록하면 되는데 평일에 무료수업을 함께 받으러 갈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중 유치원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진짜 내 모습을 마주했다. 유치원이 끝난 후 태권도에 보내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 물어봤는데 선생님은 "5세는 보호자 없이 차로 이동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라며 "유치원 적응이 힘들다면 집에 가서 쉬는 것이 낫지 아이에게 또 다른 환경에 적응시킬 필요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첫째 아이는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잘 적응해가고 있다고 했다.

아이를 영어유치원과 태권도에 보내려고 했던 것은 사실 아이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욕심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는 내 죄책감 때문이었다. 일하는 엄마라 제대로 챙겨준 것 없이 하루종일 기관에 아이를 맡기는 것에 대한 한풀이 같은 것이다. 다른 엄마들은 집에서 따듯한 밥도 챙겨주고 하원 후 다른 친구들이랑 어울릴 수 있도록 놀이터도 데리고 나가는데 그것들을 다 못해주니 돈으로라도 마음 속 죄책감을 풀어야 했던 것이다.

"태권도 안 보내도 될 것 같았는데 네가 하도 보낸다고 하니 놔뒀다." 친정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아이가 유치원 일찍 끝나고 집에 와서 심심해 하는 것보다야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노는 게 훨씬 나으니 기관에 늦게까지 맡긴다는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했다. 그 대신 퇴근 후 더 많이 안아주고 더 잘 놀아주라고 했다. 오늘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다.

[권한울 중소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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