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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세계포럼] ‘하노이 회담 이후’ 제대로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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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딜’로 북핵국면 달라졌지만 / 정부, 여전히 남북관계 매달려 / 상황 변화 냉철히 따져보면서 / 한·미공조, 대북정책 점검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요즘 북핵 문제에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지난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비핵화 협상 중단과 핵·미사일 실험 재개 가능성까지 거론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지난 9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약 핵·미사일 실험을 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라고 한 게 가장 최근 언급이다. 트럼프의 트위터에서도 ‘북한’이나 ‘김정은’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국내 정치·경제 관련 트윗을 연일 날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트럼프가 침묵을 이어가는 이유는 뭘까. 일단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섣부른 맞대응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을 피하면서 북한의 속셈을 파악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북한에 도발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라는 해석도 있다. 트럼프가 뒤로 한 발 물러나 있는 대신 그의 핵심 참모들이 번갈아 등장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 등이 북한에 대화와 압박 메시지를 내고 있다. 그제는 폼페이오가 빅딜(일괄타결) 원칙을 재확인했고, 어제는 볼턴이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재개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일보

원재연 논설위원


트럼프가 신중한 것과 달리 청와대는 급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다음날 3·1절 기념사에서 신한반도체제 구상을 발표했다. 지난 4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에서는 “남북협력 사업들을 속도감 있게 준비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17일엔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긴급 브리핑을 자청해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충분히 괜찮은 거래)을 제안했다.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전부 아니면 전무) 전략을 재고해야 한다”는 취지다. 미국이 요구하는 일괄타결식 비핵화 해법인 빅딜에 선을 그으면서 단계적·점진적 비핵화를 주장하는 북한 해법과의 절충안을 제시한 셈이다.

여당에서 ‘대북제재 해제를 위한 설득 외교’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낸 추미애 의원은 엊그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징벌적 제재를 해제하는 설득 외교를 꾸준히 펼쳐야 한다”고 했다. 이수혁 의원은 강 장관에게 “단계별 제재 완화는 미국이 생각을 안 하고 있나. 그런 협상안은 죽었느냐”고 물었다. 강 장관은 “그렇지 않다”면서 단계별 제재 완화도 미국의 협상안 중 하나라고 했다. 대북제재 강화를 요구하는 미국 조야의 기류와는 딴판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미 양측이 협상의 판을 깨지 않도록 문재인정부가 중재에 나서는 걸 나무랄 일은 아니다. 양측이 대립하면서도 대화 가능성을 열어둔 만큼 대화 테이블에 다시 앉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북·미가 하노이 회담에서 빈손으로 돌아선 뒤에도 정부가 여전히 남북관계에서 앞서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하노이 회담에서는 비핵화에 대한 트럼프 정부 입장이 분명히 드러났다. 북한 영변 핵시설 폐쇄 같은 부분적 비핵화 조치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로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회의론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상황이 변하면 대응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다. 요즘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관계자들 움직임이나 발언을 보면 이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바둑의 십계명으로 불리는 위기십결(圍棋十訣) 가운데 신물경속(愼勿輕速)이란 말이 있다. ‘서두르지 말고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두라’는 뜻이다. 대국에 임하는 자세와 전략을 나타내는 격언이다. 바둑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귀 기울여야 할 경구다. 이제라도 지난해 6·12 1차 북·미 정상회담부터 하노이 회담에 이르는 비핵화 협상 과정을 찬찬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미·대북정책 방향을 잘못 잡지 않았는지, 너무 조급해하지는 않았는지 냉철하게 하나하나 따져봐야 한다. 그래야 해법이 보일 것이다.

원재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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