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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세상 읽기] 경계를 넘나드는 ‘개방혼’ 전략으로 / 전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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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병유
한신대 교수·경제학


삼성과 현대, 엘지(LG), 에스케이(SK), 카카오가 서로 협력하는 것은 가능할까?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그림이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다. 수소경제 로드맵, 제2벤처붐 전략, 혁신성장 8대 선도사업, 그리고 넓게는 광주형 일자리까지. 그런데 ‘무엇’은 있으나 ‘어떻게’가 잘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예산을 쏟아붓고 시장은 지원금을 받아내느라 분주하다. 규제완화와 유연성이 반드시 혁신성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계획을 넘어서 기획이 요구되는 때다. “전쟁에서 ‘계획’(plan)은 소용없지만 ‘계획하기’(planning)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처럼.

‘혁신성장 계획하기’의 하나로 ‘개방혼’(open marriage) 전략을 상상해본다. 자동차-모빌리티 영역에서의 디지털 플랫폼 구축에 ‘개방형 혁신 2.0’을 적용해보는 것이다. 특화와 네트워킹에 기초한 ‘개방형 혁신 1.0’(클러스터 정책)을 넘어, 새로운 생태계에서 새로운 비즈니스가 발굴되도록 하자는 전략이다. 지역과 업종, 그리고 기업 간 경계를 넘나드는 강력한 융복합과 다양한 공급자와 사용자의 참여가 핵심이다.

바야흐로 글로벌 경제의 주도권이 디지털 플랫폼으로 넘어가고 있다. 세계 7대 슈퍼 플랫폼 기업이 전 세계 플랫폼 경제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주도 슈퍼 플랫폼의 국내 시장 지배는 국부 유출뿐 아니라 데이터 독점, 공공에 대한 통제력 상실, 산업 간 연관성 약화 등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네덜란드는 자국이 장점을 지닌 기업 간 거래(B2B) 물류와 수자원 등에서 독자적 플랫폼을 구축하는 전략을 고민하고 있다. 우리도 디지털 플랫폼에 관한 국가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

최근 디지털 플랫폼은 파이프라인 대기업이 주도하는 비투비 시장까지 확산되어 여러 산업을 하나의 다부문 생태계로 조직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모빌리티 영역은 한편으로는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기차-자율주행차-5G-차량공유가 맞물리며 디지털 플랫폼을 장악하려는 글로벌 차원의 경쟁이 국가와 업종, 기업 간 경계를 넘나들며 벌어지고 있다. 적과의 동침과 개방혼의 습속이 유행이다.

기존 재벌 중심 산업 생태계로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 전쟁에 발을 담글 수는 있을지언정 승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폐쇄적이고 수직계열화된 체제 아래서는 엔지니어 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융합마저 원천봉쇄된다. 수소경제를 추진하더라도 기존의 거버넌스, 원·하청 구조, 노사관계 관행이 답습될 가능성도 크다.

전기차-자율주행차-모빌리티로의 대전환기는 기존 산업 생태계를 혁신할 기회일 수 있다. 삼성은 자동차 대시보드를 장악하여 플랫폼 기업으로 전환하고 싶어 하고 엘지는 배터리를 기반으로 전기차-모빌리티 영역에 발을 담그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에스케이는 5G와 모빌리티를 핵심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 다만 기존 재벌 체제 아래 수직적, 분절적, 폐쇄적인 산업 생태계를 깨뜨릴 자신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형 디지털 플랫폼, 배터리-전장-자율주행-통신(5G)-차량공유 그리고 완성차가 결합하는 이종 산업 기업들의 플랫폼 법인 설립을 시도하는 건 어떨까. 유럽연합(EU) 반도체연구소 아이엠이시(IMEC)와 같이 정부-기업-연구소들이 협력하는 플랫폼 연구 법인을 설립해 데이터와 특허를 공유하는 시스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플랫폼에서 기존 생태계와는 다른 새로운 거버넌스(총수지배 체제가 아닌 전문경영 체제), 새로운 원·하청 구조(수평적이고 협력적인 열린 가치사슬), 새로운 시장 조직(독점이 아닌 경쟁 체제), 새로운 노사관계를 설계하자. 정부는 지분 투자로 참여하고 그에 따른 지분 소득은 기본소득이나 사회상속, 국가배당의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실험은 국가가 강제할 일도 아니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 투자 차원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국내 재벌 대기업들이 기업 간 ‘개방혼’을 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제조업의 위기와 불확실한 경제 환경 아래에서 기업의 생존 필요와 사회적 필요가 일치하는 지점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 기업들도 꼰대 관습에서 벗어나 ‘개방혼’이라는 유행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 기초로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이나 일본의 ‘소사이어티 5.0’과 같은 수준의 구상으로 확대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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