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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46] 집이 앓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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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집이 앓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집이 앓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집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집이 웃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집이 벌컥 화내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집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집을 비우기 위해 집을 나서는 집을 보았다 집 나간 집이 밖에서 집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밤 나는 집이 나를 꾸짖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집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재무(1958~ )

나무로 지은 시골집에서 겨울을 나다 보면 집이 몸 비트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됩니다. 시멘트 집이 그랬다간 큰일이지만 나무로 짜 맞춘 오두막의 그 소리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무들은 집으로 몸이 바뀌었을 뿐 살아 있으므로 소리 내는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희로애락의 한 가지씩을 번갈아 붙잡고 사는 우리는 그 집의 소리가 바로 우리 내면의 소리임을 금세 알아차립니다. 소리 이외에도 ‘앓고’ ‘울고’ ‘웃는’ 집의 표정은 저녁 창의 불빛으로도 드러납니다. 우리에게 ‘집’이란 그저 공간을 지칭하는 이름만은 아닙니다. ‘당신’이기도 하고 ‘생애 전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어느날 우연히 듣게 되는 어머니 혹은 아내의 기도 소리는 그의 기도만이 아니라 ‘집 전체의 기도’가 됩니다. ‘일가(一家)를 이룬다’는 말, 이 시의 여운 위에 떠올려봅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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