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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브렉시트’ 영국과 만나 변모한 장발장, 팡틴, 자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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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영국 드라마 <레 미제라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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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6월, 프랑스는 20년에 걸친 전쟁에서 패배했다. 나폴레옹은 추방당했고, 새 국왕이 곧 즉위할 예정이다. 왕정이 복구됐고 혁명은 잊혔다.” 2019년 영국 비비시(BBC) 드라마 <레 미제라블>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화면은 워털루 전투의 포연이 아직 가시지 않은 전장에서 프랑스군의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장면이다. 죽은 병사들 사이를 몰래 헤집고 다니며 옷가지와 물건을 훔치는 자들과 시신을 뜯어먹는 까마귀들을 동시에 비추는 이 오프닝 신은 비비시판 <레 미제라블>이 어떤 스타일로 전개될지 한눈에 보여준다.

1995년 제인 오스틴 원작의 비비시 드라마 <오만과 편견>부터 2016년 톨스토이 원작 <전쟁과 평화>의 각본까지, 시대극의 거장으로 명성이 높은 작가 앤드루 데이비스는 2019년판 <레 미제라블>에서 당대와 현대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춘 각색을 선보였다. 현재 원작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에서도 소득 불평등과 인종 문제 등으로 사회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브렉시트를 앞두고 혼란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다. 혁명의 열기가 스러진 절망과 혼돈의 현장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한 <레 미제라블>의 도입부는 원작 위에 지금 우리 시대를 그대로 겹쳐놓는다.

이러한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인지 이번 비비시 각색에서는 팡틴(릴리 콜린스)의 서사를 확대했다. 첫 회에서 장 발장(도미닉 웨스트)이 19년의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고 미리엘 주교를 만나 그 유명한 극적 전환을 맞는 동안, 팡틴이 해맑은 직공에서 버림받은 미혼모 신세가 되는 과정이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교차 편집된다. 2회에서는 장 발장이 한 도시를 살린 사업가이자 시장으로 신분이 수직상승하는 동안, 팡틴은 어린 딸의 생계를 위해 머리와 이빨과 성까지 팔아야 하는 거리의 매춘부로 추락한다. ‘우리 같은 여직공이 밟고 선 땅은 극히 취약해서 한순간 비참한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더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던 팡틴 동료의 말처럼, 원작의 ‘비참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밑바닥에 놓인 하류층 여성의 현실은 장 발장의 불행을 압도할 지경이다.

이번 비비시 각색에서 주목받은 또 한명의 인물은 자베르다. 흑인 배우 데이비드 오옐러워가 자베르 역을 맡아 눈길을 모은데다, 작가 앤드루 데이비스가 직접 자베르가 장 발장에게 성적으로 이끌리는 인물이라는 설명을 덧붙여 더 화제가 됐다. 이는 극중에서 장 발장이 출소할 때 자베르가 그의 나신을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났다. 제작진은 이뿐 아니라 장애를 지닌 배우들을 캐스팅하며 다양성을 추구했다고 밝혔으나, ‘흑인 게이’ 자베르라는 설정이 오히려 소수자성 몰아주기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적어도 초반까지는 그토록 악착같이 주류 사회의 질서를 수호하고 장 발장 같은 ‘범죄자’들과 철저하게 선을 그으려는 자베르의 캐릭터에 소수인종 출신이라는 점이 더 큰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다만 성소수자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질지는 아직 의문부호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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