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1 (수)

[직설]일상의 터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지난 12월 초 인천 부평 주택가의 공터, 작업복과 안전모 차림의 남자가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이 뭔가 만들기 시작한다. 나무 막대기 7개를 나란히 늘어놓고 그 위에 또 다른 나무 막대기 2개를 올려놓고 양면테이프로 붙인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무 막대기 벽을 홈이 파여 있는 스티로폼 위에 세운다. 이렇게 하나씩 벽을 만들어 세우자 이내 긴 벽이 만들어진다. 얇게 이어 붙인 나무판을 세우고 통으로 된 지붕까지 씌우고 나면 완성이다. 국내 유일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흔적인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하던 조선 노동자들의 숙소 ‘미쓰비시(三菱·삼릉) 줄사택’과 똑같은 모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경향신문

벽과 벽을 맞대어 줄줄이 늘어서 짓는 주택 형태라서 ‘줄’사택이라고 부른다는 집이다. 모형으로나마 직접 만들어보니 얼마나 허술하게 지어졌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옆집과 연결된 것은 벽 하나뿐, 그때나 지금이나 공동화장실은 여전하고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도 도시가스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좁은 삼릉 주택의 골목을 빠져나온 관객들은 미리 받은 수첩에 도장을 찍고, 새겨진 질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말로만 듣던 ‘삼릉 줄사택’에 가볼 수 있었던 것은 색다른 연극 덕분이었다. 젊은 극단 ‘앤드씨어터’가 기획한 <터무늬 있는 연극×인천_부평편>이 그것이다.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걸으며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부평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동형 공연이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그 지역만이 품고 있는 고유한 이야기를 찾고, 생각할 기회를 주는 공연이었다.

<터무늬 있는 연극×인천> 시리즈는 사람에게 지문이 있듯이 땅에도 새겨져 있는 고유한 지문, 즉 터의 무늬를 찾기 위한 작업으로 그동안 배다리와 십정동, 송도 등지에서 공연됐다. 땅을 ‘부동산’이나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기획할 수 없는 공연이다.

언제부터인가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내 집은 없을까” 중얼거리며 한숨 쉬는 주인공 말이다. 옥탑방에서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뒷모습과 함께 보이는 한강과 서울의 야경,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비춰주면서 드라마는 다음 컷으로 넘어간다.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서 그 고민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마음 놓고 지낼 ‘지상의 방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은 지 오래이고 상가는 끊임없이 들어서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는 ‘공간’이다. 오래된 재즈클럽, 자리를 잡아가는 동네책방, 젊은 부부가 하는 작지만 맛있는 음식점도 2년마다 아슬아슬하게 버틴다. 동네에서 뭘 좀 해보겠다는 청년들이나 함께 모여 오카리나를 부는 동호회 사람들도 안정적인 공간, 그러니까 ‘터전’에 목말라 있다. 나영석 PD는 <합니다, 독립술집>이란 책의 추천사에 “사람들의 발걸음과 이야기가 공간에 모인다. 관계와 시간이 축적되면 신기하게도 공간에 힘이 생긴다”라고 썼지만, 공간들이 모여 ‘자리 잡을’ 터전은 사라져가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봐도 ‘건물주가 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답답할 따름이다.

얼마 전 다녀온 삼릉 줄사택은 지금 논란에 휩싸여 있다.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주차장 등을 조성하자는 의견과 역사적 가치 검증을 통해 문화특구로 개발하자는 의견이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삼릉 사택을 그대로 철거한다면 역사의 터전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말 테다. 전 세계에서 유행이라는, 지역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동네 빵집, 카페, 공동 주택 등의 주인이 되는 ‘시민자산화’ 논의라도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터무늬 있는 연극’처럼 일상의 터전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한편, 그 터전을 단단하게 만들어나가기 위한 시도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날 연극에서 찍은 도장의 질문이 여전히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개발이 사람을 떠나가게 하는 걸까 모이게 하는 걸까?’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할까?’ 당신의 대답이 궁금하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