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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상속 통한 부의 대물림… 불평등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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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선 재산 주고 부양받는 ‘계약서’ 작성/동아시아선 지배층 유리한 상속제도 선택/조선 양반 ‘종가문화’ 통해 지위·재산 보존/

심화하는 경제 양극화 뿌리는 편법 증여/동서고금 상속 역사 들여다보며 해법 모색

세계일보

백승종 지음/사우/1만6000원


상속의 역사/백승종 지음/사우/1만6000원


한국의 경제적 양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임금이나 사회적 불평등보다도 편법 증여가 양극화의 주요인으로 지적된다. 편법 증여 등 상속은 갈수록 지능적이다. 재벌 등 한국 부자들은 막대한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곤 한다. 속된 말로 ‘부모가 열심히 일해 모은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준다’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 수는 없다. 그러나 편법 증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삼성그룹을 비롯한 대부분 재벌들의 상속은 편법을 동원한다. 한국의 상속제는 광복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사실상 일제 강점기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대물림을 이어가고 있다.

저자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핵심은 상속이라고 단언한다. 상속제 전문가인 백승종 코리아텍 대우교수는 상속에 관한 동서고금 얘기를 지루하지 않게 전해준다. 저자는 “상속제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권력을 얻거나 부자가 되고, 신분이 추락하거나 가난으로 내몰렸다”고 풀이했다.

저자는 재산 상속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먼저 전개한다. 사유재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처자까지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 플라톤과 이에 맞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은 흥미롭다. 고대 중국에서도 공유제 논쟁이 일었다. 묵자가 주장한 겸애설은 본질적으로 공유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

“묵자는 남과 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면 신분 차별도 사라지고, 강국과 약소국의 갈등과 대립도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겸애를 실천하면, 사회적 약자도 보호받을 것이며, 전쟁과 다툼이 사라져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맹자를 비롯한 유가의 스승들은 묵자의 이상론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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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를 만들어내는 재벌의 대물림이나 부자들의 대물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형식만 다를 뿐 편법적 수단을 동원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양의 부모들은 상속과 부양에 관해 자식과 은퇴계약서를 작성했다. 은퇴계약서는 연금제도가 보편화하면서 20세기 초 무렵에는 사라졌다. 지금 서구에서 자식에게 재산을 그대로 물려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미국의 경우에도 부모 재산이 교회나 복지재단, 국가 등으로 귀속되는 사례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물론 편법 대물림 수단으로 복지재단을 활용하는 경우는 있다. 그렇더라도 천문학적인 재산을 그대로 물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상속계약서를 작성할 필요가 없었다. 유교사회에서 효도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노후를 염려해 계약문서를 만든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과거 한국의 지배층은 유리한 상속제도를 선택해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재산을 지키고자 했다. 양반가 중심으로 이뤄진 제도가 종가문화였다.

저자는 “한국의 종가문화는 양반 가문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사한 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종가문화는 유교적 효 개념과 더불어 독특한 한국문화를 이뤘다. 상속에서 여성은 차별되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성들은 자기 명의로 재산을 소유하고 자기 뜻대로 상속할 수 있었다. 16세기 후반 들어 권리가 축소되면서 거의 경제권에서 배제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여성의 권리는 더욱 위축되었다. 남성 위주의 호주제 때문이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남성과 동등한 상속권이 여성에게도 인정되면서 조선시대 초기의 상속법이 복구됐다.

조선 실학자들도 상속으로 인한 부 대물림을 비판했다.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정약용 등 실학자들은 부의 집중을 막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을 구제할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이후 조선의 지배층은 부의 집중으로 인한 문제점을 인식하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저자는 애초 동학농민운동은 상속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대안 운동이었다고 설명한다.

“동학에서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실천을 강조했다. 가진 자(유)와 못 가진 자(무)가 서로(상) 의지(자)함으로써 내부 결속력이 강화되었고, 삶의 질도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동학농민군은 유무상자를 광범위하게 실천했다. 그랬기에 일반 백성들조차 동학농민군을 의롭게 여겼다.”

저자는 현대판 ‘유무상자’의 사례로 독일 세탁기 회사 ‘밀레’를 소개한다. 밀레는 사용자와 노동자가 상생하는 회사였다. 상속세를 피해가려는 재벌의 편법이 난무하는 우리 상황에서 새겨들을 만한 기업 운영이다.

저자는 결론에서 이렇게 밝혔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부의 독점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난 20년간 양극화가 극심해진 상황을 고려할 때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적잖은 희망을 발견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인류의 역사는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합목적적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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