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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김지영` 그 이후…여성, 소설의 주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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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왼쪽부터 이신조·구병모·정세랑·우다영 소설가. 여성의 삶을 담담한 목소리로 담아낸 소설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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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呼名)만으로 혁명(革命)인 장르가 있다. 소설이다. 들여다보고 말함으로써 소설은 힘을 가진다. 여성을 호명한 소설은 문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범주로 어느덧 자리매김했고 때로 문학이 심리학, 정치철학, 인류학으로 뻗어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의 폭발적인 반응 이후, 소설의 이 같은 확장성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왔다. 여성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 현재의 우리를 꿰뚫은 소설 신작을 한자리에 모았다.

소설가 구병모(42)의 '단 하나의 문장'(문학동네 펴냄)에서 눈에 띄는 단편은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이다. 정주는 임신 7개월째로, 남편의 전근 탓에 시골로 비자발적인 이사를 떠난다. 자기 집인 양 정주의 대문을 드나드는 동네 노부인은 정주의 둥근 배를 툭툭 만지며 인상적인 잠언을 남긴다. "대대로 조상 잘 모셨으면 고추지 뭘." 세대를 거듭하며 고착된 무언의 관용은 경악스럽다. 관용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허용되는 미지의 선을 소설은 묻는데, 숨이 턱턱 막힐 만한 끔찍한 문장이 독자의 숨통마저 턱턱 막히게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이 소설로 2018년 이상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다른 단편 '미러리즘'은 여성의 삶을 강제하는 사회에 대한 은유다. 남성을 생물학적 여성으로 바꾸는 '주사기 테러'라는 기묘한 설정이 눈에 띈다. 차별과 배제에 익숙한 여성으로서 생은 "인생 궤도를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하는" 느닷없는 일이며 나아가 "불의의 사고"다. 문학평론가 신샛별은 구병모 소설을 두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또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어떤 근심과 불안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사회학적 시선으로 탐문한다"고 평했다.

다음은 소설가 정세랑(34)이다. '옥상에서 만나요'(창비 펴냄)를 펴면 곧장 '정세랑 월드'로 빨려 들어간다. 눈여겨볼 단편은 '이혼 세일'로, 남편의 불가해한 폭력에 이혼을 결심한 이재가 친구들에게 살림을 처분하겠다며 초대장을 보내며 소설은 시작한다. 지옥에 버려진 듯한 기분으로 육아에 매몰되거나 종양으로 '맘모톰' 수술을 받는 이재의 친구는 우리 주변의 풍경이다. 너무 흔해 외면 받던 그들에게서 작가는 "이해받지 못한 기분"으로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여성을 끄집어낸다. 이재의 장아찌 비결인 '누름돌'은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결혼이란 현실의 질량감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하나의 대여용 웨딩드레스를 빌려 입은 여성 44인의 이야기를 엮은 단편 '웨딩드레스 44', 성희롱과 부조리에 지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회사 선배의 비급서를 받고 절망에서 탈출하는 단편 '옥상에서 만나요'는 여성 사이의 어떤 연대의 가능성을 일러준다. 문학평론가 허희는 "정세랑의 단편은 여성과 남성이 이중 구속 상태에서 해방돼야 하는 결사체임을 피력한다"고 해석하며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는 여성성·남성성의 투박한 잣대에 대체 언제까지 휘둘려야 하나"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다른 소년'(문학동네 펴냄)에서 소설가 이신조(44)는 상처를 껴안고 '다른 나'로 이행을 지향하는 여성을 담았다. 단편 '그림자 가이드'가 대표적이다. 두 달 전 자궁근종을 제거한 태은은 미지의 코스로 구성된 이른바 '그림자 여행'을 떠난다. 열 살 터울의 수향이 태은을 보좌하지만 하루 일과는 가이드인 수향만 안다. 태은은 나뭇가지로 북을 만들고 새터민 여성을 만나는 기이한 경험으로 여행을 만끽한다. 그네에 올라 북소리를 들으며 손톱만한 달을 발견하는 태은의 모습은, 깊은 어둠에서 한줌 여명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처럼 읽힌다.

단편 '1105호'에는 레지던스 호텔에 머물며 조별 과제를 하거나 군대에서 휴가 나온 남자친구와 일상을 보내는 예슬이 등장한다. 호텔 안에서 예슬의 일상은 일견 무료하게 보이나 호텔 밖에는 '데이트 메이트'였던 선배 강민에게서 데이트 폭력을 당한 어두운 기억이 버티고 있다. 도심 속 익명의 공간인 1105호의 문은 안온한 내부와 두려운 외부를 묘하게 대비시킨다. 문학평론가 이지은은 "이신조의 소설은 낯선 공간에서 깨어난 인물이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과정, 곧 어제의 '나'로부터 '다른 나'로 이행하는 시간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밤의 징조와 연인들'(민음사 펴냄)을 쓴 소설가 우다영(28)은 우연한 폭력을 마주한 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일어날 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여성을 그려낸다. 단편 '기분에 이르는 유령들'에서 현철은 염산 테러를 당해 뼈를 드러낸 채 붕대를 감고 중환자실에 누운 딸의 과거를 추적한다. '묻지마 범죄'가 일어난 지 아홉 시간 만에 딸은 손목을 긋는다. 현철은 미지의 범인을 추적하며 딸의 과거와 범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때 아버지로서 현철이 갖는 "형형한 살의"는 여성으로서 이 땅의 모든 여성이 매일 품고 사는 심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한영인은 "어쩌면 우다영은 우연과 불확실성 속에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 조건을 너무 일찍 알아차린 작가인지도 모른다"고 평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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