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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미국 거주 탈북자 가족들의 특별한 나들이,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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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이 집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니 멋진 일이네요.”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 부모 밑에서 미국에서 출생한 8살 리예슬 양이 워싱턴 DC에 소재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둘러본 뒤 8일(현지시간) 방명록에 남긴 글귀이다. 예슬이는 이날 남동생과 함께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자동차로 2시간이 더 걸리는 먼 길을 달려와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예슬이네는 미국의 워싱턴 DC 일원에 거주하는 탈북자 10여명의 가족과 함께 이제는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사관의 특별 초청을 받았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박물관은 지난 5월 22일 개원한 이래 처음으로 미국에 사는 탈북 주민을 한자리에 모아 공동으로 박물관 관람을 하도록 주선했다. 이 공사관은 남북한이 분단되기 훨씬 전인 대한제국 시대에 운영됐기 때문에 북한 주민도 ‘당당한’ 주인이라는데 착안한 이벤트였다. 공사관 초청을 받은 일부 탈북 주민은 예슬이네처럼 2∼3시간을 운전해 공사관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일부 구면인 사람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이곳에서 처음 만난 탈북 주민들도 한순간에 진한 동포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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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대한제국공사관 박물관 소속의 역사학자 한종수 박사가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일원에 거주하는 탈북 주민 10여 가족을 특별 초청해 공사관의 역사적 의미와 전시물 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국기연 워싱턴 특파원


오수동 박물관장은 공사관 관람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대한제국 공사관은 남한만의 역사가 아니고, 남북한 모두의 역사이다”며 탈북 주민들에게 ‘주인 의식’을 심어주었다. 이 공사관 안내에는 박물관 소속의 역사학자인 한종수 박사가 직접 나섰다. 탈북자 중 상당수는 이미 대한제국의 역사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었고, 초대 공사 박정양 등 역사적인 인물과 마주할 때마다 한 박사를 상대로 질문 공세를 펴기도 했다.

탈북 주민의 첫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1층 벽면에 걸려 있는 대형 태극기였다. 이 태극기는 1893년에 걸려 있던 대한제국 태극기를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현재의 태극기와는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 박물관 개관식 날 이곳을 방문해 이 태극기 앞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됐을 때 현재의 태극기 모양과 달라 태극기가 뒤집어 걸린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던 바로 그 태극기이다. 한 탈북자는 “이런 태극기는 처음 본다”면서 “우리가 조선 시대부터 이런 태극기를 사용했느냐”고 물었다. 한 박사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홍영식 얘기를 꺼내자 또 다른 탈북자는 “홍길동은 알겠는데 홍영식은 모르겠다”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

한 박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이곳 미국의 공사관에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고 공사관 박물관의 역사적 가치를 설명했다. 탈북 주민들은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핸드폰을 꺼내 연거푸 사진을 찍으면서 “이것은 오리지널이냐”, “가구 양식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한 박사가 공사관원으로 일했던 이완용의 사진을 보여주자 한 탈북자는 “그 사람, 우리나라 팔아먹은 배신자가 아니냐”고 언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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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지난 5월 22일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방문해 1층 벽면에 걸린 태극기 앞에서 공관원 후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한 박사는 공사관 정당에서 당시 관원들이 직접 배알할 수 없는 임금이 있는 궁궐 쪽을 향해 임금에 대한 공경과 충성을 다짐하는 뜻으로 배례하는 의식을 올린 망궐례를 했다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탈북 주민들은 너도나도 “북한이랑 똑같네”라고 탄성을 질렀다. 한 탈북자는 “북한에 있을 때는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대원수님께 감사의 절을 올리고 먹었다”고 했다. 또 다른 탈북자는 “인제 보니 우리가 유교 전통 속에서 살고 있었나 보다”고 맞장구를 쳤다.

탈북자들은 특히 조선과 청국 관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현재 북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인식 탓인지 조선과 청국의 역학 관계를 한 박사에게 캐물었다. 한 탈북자는 “대한제국 공사관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면서 북한 측에 조언을 요청하지는 않았느냐”면서 “과거에 한국이 단군에 관한 고증이 필요해 북한 측에 필요한 자료가 있는지 문의한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탈북 주민은 대한제국 공사관을 일본에 강탈당한 과정을 캐물었다. 그는 “우리가 일제 식민 통치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한 박사와 탈북자들은 즉석 토론을 거쳐 “힘을 길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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