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7 (화)

[양승훈의 공론공작소]비대면 사회에 대한 경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기능 중 하나는 가계부 앱이다. 술과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에 계획성 없는 소비를 좀 통제하고 싶어서다. 예전에는 은행과 카드사에서 문자가 오면 그 내용을 복사해 앱에 붙여 넣는 방식으로 가계부에 기입할 수 있었다. 이제는 공인인증서를 등록하면, 매 시간 쓴 돈이 자동으로 업데이트되고 자산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신규 기능이 가끔 마음을 불쾌하게 한다. 앱은 돈 쓰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대출받는 상황을 통해 내 신용등급을 예측한다. 식당 이름이나 서점 이름 등을 통해 지출 카테고리를 추정한다. 좀 지나면 거의 모든 지출 출처와 범주를 빅데이터를 활용해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지출 기록도 데이터베이스에 누적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회사가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신용등급을 예측하는 모델을 어딘가에 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앱을 만드는 회사는 보험사와 평가 모델을 공유하고 자동차 보험료 할인 행사를 시작했다. 비대면 ‘다이렉트’로 가입하는 손해보험사에서 내 운전습관을 이유로 가입을 거절하거나 막대한 보험료를 계상하는 일도 머지않았다. 그럼에도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기반을 둔 비대면 서비스는 늘어날 것이고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서비스에 노출될 것이다. 편리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전문은행에서 대출을 받아보면 비대면의 위력을 알게 된다.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묻고 따지는 게 없고, 기다리거나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일도 없다. 정량화된 근거를 기준으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경향신문

채용에 있어서도 공공기관을 필두로 블라인드 면접 등 비대면 절차가 확산되고 있다. 면접 볼 때 면접관에게 제공되는 정보 중 출신지와 학력사항, 가족관계 등이 가장 먼저 사라졌고, 사진도 사라지고 있다. 면접 시 커튼을 치기도 한다. 성별 판단을 막기 위해 음성 변조도 도입될 기세다. 면접 절차도 표준화된 질문 몇 가지에 대한 대답으로 변환 중이다. 면접자의 답변에 꼬리를 물어 질문하고 대답을 유도하는 것도 반칙이 된다. 개개인의 인적정보가 은연중에 드러나고 그것이 가점 요인이 되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채용비리가 연달아 발생하자, 오로지 ‘객관적인 직무역량’만으로 뽑아 달라고 하는 구호에 사람들은 공감한다. 인공지능(AI)이 표준화된 질문을 하고 ‘인재상’과 ‘필수역량’에 맞는 대답을 한 후보자를 선별하는 알고리즘이 상용화된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쓸데없는 신변잡기’나 묻는 면접 대신 인공지능을 통한 ‘비대면 면접’이라는 모순된 전형을 보게 해달라 할지도 모르겠다.

영국드라마 <블랙미러> 중 ‘추락’이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드라마 속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스마트폰으로 평가한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는 5점의 높은 점수를 주고, 불쾌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1점을 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점수를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평점이 높은 사람에게는 더 친절을 베푼다. 평점이 높은 사람의 평가에 가중치가 붙기 때문이다. 반대로 평점이 낮은 사람은 회피한다. 잘해줘 봐야 자신의 점수가 별로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비스와 행정도 사람들을 평점에 따라 대우한다. 주인공은 친구 결혼식 증인을 하러 비행기를 타려는데, 비행기편이 취소된다. 긴급 항공편을 찾지만 자리는 없다. 공항에 오기 전에 실수로 평점이 높은 사람에게 음료를 엎질러서 보복으로 감점을 당하는 바람에, 긴급 항공편 탑승 점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주인공은 항공사 직원에게 욕을 하고, 벌칙으로 점수 1점이 떨어진다. 졸지에 신뢰할 수 없는 불가촉천민으로 추락한다. 드라마는 ‘비대면 면접’의 상황이 극단으로 갔을 때의 사회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든 호의와 친절을 베풀지만 그 안에는 대면의 상황이 없다. 누군가를 대면한다는 것은 상대의 사정과 상황의 맥락을 충분하게 고려한다는 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면접을 하고 면접을 당하지만, 상대를 알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는 누군가의 사정을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만이 일반적인 평가 기준이 된다.

드라마 속 상황은 현실과 그리 멀지 않다. 우리는 숨 쉬듯이 비대면 면접을 하고, 당하고 있다. 상담사의 서비스 수준을 5점 척도로 평가하고,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콜택시 기사를 만나면 뒷좌석에서 조용히 낮은 평점을 준다. SNS를 켜서는 ‘좋아요’와 친구신청 등의 행위를 통해 사람들을 평가한다. 페이스북은 유사한 사람들을 군집으로 만들어 그들끼리의 정보가 타임라인에 더 많이 보이게 하거나 친구를 추천하는 수준으로 알고리즘을 작동시키고 있지만, 사람들의 행동과 글쓰기 패턴에 가중치를 줘서 등급화를 매긴다면 사람 각각의 일반적 평점을 매기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대면으로 사람들의 행태를 정량화하여 평가하고 예측할 기술적인 준비는 착착 진행 중이다.

물론 사람들이 비대면 서비스를 원하고, 대면 면접보다 필기시험이나 정량화된 평가를 원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문화적 지체에 따른 말과 행동의 폭력을 느끼는 데서 출발한다. 불친절한 공무원이 피곤하고, ‘아무 말’이나 하는 택시기사가 불안하다. 편파적으로 보이는 면접관과, 내신과 비교과항목을 평가하는 교사의 말을 믿기 어렵다. 즉 누적된 비리와 폭력의 부조리함에 대한 사회적 불만의 표출이다. 그러나 기술적 해법들은 편리하지만 대개 인간들의 교류를 차단하고, 맥락을 무시하며, 위험요소를 배제하는 방식들이다.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감각을 가진 인간들이 영영 만날 수 없는 세계가 만들어지는 중이다. 배제되는 것은 가난하고 낙후된 사람들일 공산이 크다. 사회적 논의는 편리함과 위험 배제, 숫자의 합리성만으로 진행될 수 없다. 맥락들이 사장되어선 안된다. 사회에 대한 신뢰와 문화적 지체의 해소는 역설적으로 상대에 대해 이해하고 교섭하거나 투쟁하는 등 ‘대면’ 과정과 ‘겪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단칼에 정리하기보다는, 공론화위원회처럼 장기간을 두고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지루한 과정을 통해서만 잘 풀어낼 수 있다. 그런데 피곤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며 대면을 최소화하려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다. 편리함과 거슬리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만족, 승복할 수 있는 숫자보다는 좋은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고리부터 끊어내야 할까? 논의의 방향은 바뀌어야 한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