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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과학을읽다]'은행(銀杏)' 생존의 법칙, "고얀 냄새를 풍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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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노란 은행나무가 최고입니다. 그러나 냄새를 풍기면 정취는 악취로 변하고 말지요.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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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서늘한 바람에 노란 단풍잎이 떨어지는 풍경은 가을에 느낄 수 있는 익숙한 정취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져 있으면 정취는 악취가 됩니다. 친숙할 수 없는 냄새 때문에 피하고 싶어도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 은행나무 열매를 피해 땅을 밟기가 쉽지 않지요. 은행나무 열매에서는 왜 똥냄새 같은 누린내가 날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은행나무는 씨방이 없는 겉씨식물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밑씨가 바람에 의해 옮겨져 수정이 이뤄집니다. 씨방속에 암술과 수술이 모두 들어있어 스스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속씨식물과 다르지요.

스스로 씨앗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바람에 날라온 수나무의 포자를 받아야만 암나무가 열매를 맺고 그 속에 씨앗을 감추는 것입니다. 은행나무 열매는 살구와 비슷하게 생겨 살구 '행(杏)'자와 겉껍질이 은색이어서 은빛 '은(銀)'자를 써서 ‘은행(銀杏)’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우리가 은행나무 열매로 알고 있는 은행은 사실 열매가 아닌 변형된 씨앗인 것이지요. 이 씨앗이 땅속에 스며들어 싹을 틔워야 은행나무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식동물이나 새가 이 씨앗을 주워 먹으면 안됩니다.

독한 냄새는 이 씨앗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씨앗을 감싸고 있는 겉껍질인 과육에는 '빌로볼(Bilobol)'과 '은행산(Ginkgoic acid)' 등의 성분이 있는데 이 성분들이 악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탄소로 이루어진 은행산이 땅에 떨어져 외부의 껍질이 터지면 부패하면서 독한 냄새를 풍깁니다. 이 성분은 독성도 함유하고 있는데 피부와 접촉하면 피부염이나 알레르기까지 유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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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거리에 떨어진 은행 밟기가 두려우시죠. 은행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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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독성 때문에 초식동물이나 새들도 은행은 중독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냄새가 벌레의 침입도 막아줘 은행나무는 병충해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에게는 독하고 해로운 냄새지만 스스로에게는 가장 든든한 방어막인 것입니다.

그런 방어막 때문인지 은행나무는 고생대 마지막 지질시대인 페름기(permian, 2억8000만~2억3000만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한 흔적이 있고, 공룡시대인 쥐라기(Jurassic, 1억8000만~1억3500만 년 전) 이전부터 지구에 정착할 정도로 가장 오래된 생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구에 몇 번이나 빙하기가 닥치면서 수많은 생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은행나무는 살아 남았습니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진화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겠지요.

2억~3억년 전의 화석식물인 은행나무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번식을 위한 강력한 방어막도 있었겠지만 강력한 환경 적응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춥거나 덥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라도 살 수 있고, 아무리 오래된 나무도 줄기 밑에서 새싹이 돋아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이가 수백에서 천년이 넘은 고목 은행나무의 상당수는 원래의 줄기는 거의 없어지고 새싹이 자라 둘러싼 새 줄기라고 합니다. 유독 수령이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잎에는 플라보노이드(flavonoid), 터페노이드(Terpenoid), 비로바라이드(Bilobalide) 등 항균성 성분들이 포함돼 병충해가 거의 없습니다.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많이 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병충해 예방뿐 아니라 이산화탄소, 질소, 아황산가스 등을 흡수해 이런 성분을 정화하는 능력도 탁월하다고 합니다. 대기 오염, 토질 오염, 수질 오염, 중금속 오염까지 어느 정도 중화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무라 귀히 대접 받는 것이지요.

은행나무는 오래 살면서 수형도 크고 아름다운데다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으로 대접받기도 했습니다. 또 결이 곱고 탄력성이 있어 목재로써의 인기도 높습니다. 게다가 냄새난다고 회피했던 그 열매 속에 든 씨앗 '은행'은 심장통, 천식, 고혈압 등에 효과가 뛰어나 약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석유의 대체재로 개발되거나 화생방 무기의 해독제, 화장품 개발 등 두루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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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열매는 살구와 비슷하게 생겨 살구 '행(杏)'자와 겉껍질이 은색이어서 은빛 '은(銀)'자를 써서 ‘은행(銀杏)’이라고 부릅니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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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처음부터 냄새나는 열매를 맺지 않는 수나무만 심었다면 가을마다 냄새 때문에 코를 막진 않았을 텐데요? 그러고 싶었겠지만 은행나무는 최소 30년은 지나야 열매를 맺는데 그 이전에는 암수나무를 구별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자란 암나무들이 이렇게 씨앗품은 열매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암수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발전한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지난 2011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DNA 분석을 통해 어린 은행나무의 암수를 구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국제특허를 냈습니다. 그 이후 점차 수나무로 교체하거나 암나무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농가에는 은행 채집을 위해 암나무를 심고 거리에는 수나무를 심는 식으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은행의 누린내를 제거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물티슈로 신발 바닥을 닦기만 해도 냄새가 어느 정도 제거되기는 하지만 성분이 워낙 독해 물로는 냄새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냄새를 완전히 지우고 싶으면 치약을 발라 신발 밑창을 싹싹 문질러야 합니다.

이렇게 질리고 이로운 은행나무도 멸종 위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자생하는 종이 거의 없고, 바람에 날려 보내기엔 씨앗이 너무 무거운데다 그나마 날려가도 콘크리트 바닥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관리해주지 않으면 번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은행나무는 가을 한 철 냄새가 고약하기는 하지만 사람들과 그 만큼 친숙한 나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냄새 한 가지로만 은행나무를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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