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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독재와 폭력에 맞섰던 로메로 대주교, 성인의 반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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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독재 정권에 맞서다 암살당한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가 서거 38년 만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경향신문

엘살바도르 사람들이 13일(현지시간) 산살바도르에서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을 축하하며 그의 사진을 들고 있다. 산살바도르|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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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현지시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시성 미사를 열고 로메로 대주교를 비롯한 7명을 가톨릭의 새로운 성인으로 선포했다.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된 지 38년 만이다. 엘살바도르 군사 정권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로메로 대주교는 종파를 초월해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교회 보수파들은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것”이라며 그의 시성을 반대해왔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2월 그를 가톨릭 순교자로 공식 인정했고, 같은 해 5월 성인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복자(福者)로 선포하며 그의 시성을 추진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1917년 엘살바도르의 시우다드바리오스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학업을 중단한 뒤 목수일을 배우던 그는 20세가 되던 1937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신학교에 입학해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1942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산미구엘 교구장을 거쳐 1977년 산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이때까지 그는 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보수적 학구파 사제였다. 당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사회 참여를 주장한 해방신학에 대해서는 ‘증오에 가득찬 그리스도론’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친구였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죽음은 그가 엘살바도르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예수회 사제이자 해방신학자였던 그란데 신부는 당시 군사 정권의 폭정을 비판하다 우익 민병대 손에 피살됐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50년 가까이 지속된 군사 독재로 극심한 부정부패에 시달렸고, 일부 지주가 전 국토의 60%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빈부 격차도 극심했다. 농민과 학생 등이 항거했지만 군사 정권은 1980년 한해에만 1만명 이상을 살해하며 이를 폭압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그란데 신부가 해온 일 때문에 그들이 그를 죽였다면 나 또한 같은 길을 가겠다”고 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시민단체와 연계해 정권이 자행한 살인과 폭력을 기록하고 고발했다. 군인과 민병대에 “당신들의 형제인 농민을 죽이는 것을 중단하라. 죄악으로 가득한 명령을 거부하고 양심에 따르라”고 했다.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당신이 보낸 무기는 우리 국민들을 죽이는 데 쓰인다”는 편지를 보내 군사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교회에 내세에서의 구원 뿐 아니라 현세에서의 구원에도 나설 것을 요구했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과 불의한 환경에서 부르짖는 모든 사람들은 교인이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1980년 3월24일 그는 기자들에게 “그들이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할지라도 나는 엘살바도르인들의 가슴 속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프로비덴시아 병원 내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2009년 엘살바도르 정부는 그의 죽음에 당시 정권이 개입했음을 인정했다.

유엔은 2010년 그의 순교일을 ‘국제 모든 인권 침해와 관련된 진실에 대한 권리와 희생자의 존엄을 위한 날’로 선포했다.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 신자인 그를 20세기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선정했고,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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