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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 (28)민담선 권선징악…창세신화는 승패와 이승·저승의 절묘한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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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갈등과 신화

경향신문

왕권신화에서는 주인공의 선악이 문제되지 않는다. 이긴 쪽이 선일 뿐이다. 하지만 민담은 패자의 말이고 약자의 신화다. 그래서 민담에서는 약자가 지다가도 마지막에는 승리한다. 민담의 구조는 창세신화의 거울이다. 그래서 창세신화는 승패와 선악, 이승과 저승의 절묘한 균형을 이야기로 보여준다. 이 균형을 깨는 것은 늘 권력욕이며, 왕권신화는 권력욕의 서사화다. 사진은 형제 갈등을 다룬 창극 흥보가의 한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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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린(1894~1951)이 1926년 펴낸 <조선동화대집(朝鮮童話大集)>을 보면 ‘착한 아우’라는 제목을 단 ‘동화’가 실려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악한 형과 선한 동생’ 이야기다.

하루는 배가 너무 고팠던 착한 아우가 형수한테 밥을 달라고 한다. 그때 방에 있던 형이 뛰어나와 ‘뭔 밥이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화로에 꽂혀 있던 부젓가락으로 아우의 눈을 찌르고는 쫓아낸다. 아픈 눈을 감싸 안고 뒷산에 올라간 아우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죽을 작정으로 높은 나무에 올라간다. 목을 매려고 허리띠를 풀고 있는데, 나무 밑으로 호랑이 한 쌍이 온다. 놀라 숨을 죽인 사이 호랑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게 된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더라. 저 산봉우리 뒤에 있는 샘물로 눈을 씻으면 장님도 눈을 뜨는데 모르고 그냥 다니더라.”

“그래, 사람같이 미련한 것들이 또 있다더냐. 그 샘물 밑으로 좀 내려오면 큰 바위 밑에 금독 은독이 묻혀 있는 것도 모르더라.”

아우는 죽을 마음을 버리고 샘물을 찾아 눈을 치료한다. 바위 밑을 파내어 금은으로 논밭을 사고 큰집도 지어 부자로 산다. 형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자초지종을 묻자 착한 아우는 곧이곧대로 일러준다. 아우한테 제 눈을 찔러 달라고 했지만 들어줄 리 없다. 오히려 아우는 재산 절반을 나눠주겠다며 말린다. 하지만 형은 제 눈을 스스로 찌르고는 뒷산 나무에 올라간다. 조금 뒤 호랑이들이 나타났지만 기대와 달리 사람냄새가 난다면서 형을 잡아먹으려고 한다.

한데 마무리가 좀 이상하다. “한 번 더 용서하는 것이니 아우의 말을 잘 들어라.” 이렇게 꾸짖고는 간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아무래도 심의린의 개작으로 보인다. <조선동화대집>은 방정환과 아동문화운동을 함께했던 심의린이 어린이용 ‘동화구연자료집’으로 묶은 책이다. 아마도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고 착한 아우를 돋보이게 하려고 고쳤으리라. 사실 구전되는 이 민담의 결말은 악한 형이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판소리 <흥보가>로 연창되기도 한 전형적인 권선징악 이야기다.

나는 이 ‘선악형제담’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이 민담이 대단히 신화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형제들은 싸우게 마련이다. 자매들도 그렇다. 그 갈등은 근본적으로 성장기에 부모의 애정을 차지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형제자매를 ‘타인의 시작’이자 ‘영원한 경쟁자’라고 말한다. 그러니 문제로 삼을 바는 갈등이 아니라 갈등을 조절하는 방법 또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선악형제 이야기가 갈등을 어떻게 조절하고 있기에 신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심의린은 나쁜 형을 교화하려고 ‘한 번 더 용서하는 호랑이’라는 결말의 형식을 만들어냈지만 신화는 본래 그런 교화에는 관심이 없다.

경향신문

그림책으로 표현된 대별왕과 소별왕의 해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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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선악형제담의 수원지인 창세신화로 우회해 보자. <천지왕본풀이>나 <초감제> 등으로 불리는 제주도 창세신화에는 천지왕 또는 옥황상제(하늘옥황)로 불리는 창세신이 등장한다. 이 창세신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다. 창세신이 하강해 지상의 여성과 짝을 지어 낳은 반인반신의 영웅들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창세 과업에 동참하는데, 주요 임무는 해와 달의 숫자를 조절하여 음양과 사계의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이들은 해와 달이 둘씩 솟아 있는 무질서의 상태를 천근의 무쇠 화살을 쏘아 정리한다. 화살에 맞아 떨어진 해와 달은 별로 재탄생한다. 아버지의 창세 과정에 동참하는 이들 쌍둥이도 창세신이다. 별을 만들었다고 해서 대별왕·소별왕이란 이름도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아버지의 명을 받아 ‘일월쏘기’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릴 때는 갈등이 없었다. 창세신 아버지의 애정이 한쪽으로 쏠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지일월성신의 질서 위에 창조된 ‘이 세계를 누가 다스릴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갈등은 시작된다. 균분하면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가 독차지해야 한다면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창세의 과정에는 선악이 개입될 여지가 없지만 창조된 세계를 차지하는 과정에는 선악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이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는 저 유명한 수수께끼 내기를 벌인다. 내기의 목표는 ‘이승을 관리할 만한 창조력을 둘 중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판정하는 것이다. 몇 단계의 내기를 거쳐 최종 종목에 이른다. 유라시아 신화사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자면서 꽃피우기 내기’다(<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참조). 한데 이 내기에서 가장 긴요한 대목은 창조력을 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는 형 대별왕이 진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는 이기고도 진다. 자신이 피운 꽃을 동생한테 도난당했기 때문이다. 게임의 규칙을 위반한 동생이 결국 세상을 차지한다. 소별왕으로 인해 세상에 악이 들어온다. 소별왕이 ‘인간 정권을 잡으면 인간 세상에 도적이 많을 것’(문창헌 본, <천지왕본>, 1929~1945)이라고 아버지 천지왕이 예언하지 않았던가. 형은 이렇게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1926년 펴낸 ‘조선동화대집’ 보면

나쁜 형서 착한 동생 지키는 구조

민담은 행운·불운 조절 의지 다뤄

창세신화선 대별왕·소별왕 ‘마찰’

‘저승’ 창안해 공간 나눠 충돌 막아

형제신 사이에선 승패 없이 결말

닌토쿠 천황 왕위 계승 과정 ‘다툼’

대소 왕자에 ‘위협’ 받는 어린 주몽

어느 왕조든 왕권 신화 ‘비극’ 담아


“설운 아우 소별왕아 이승법을 차지하여 들어서라마는 인간에 살인, 역적이 많으리라. 검은 도둑이 많으리라. 남자 자식은 열다섯이 되면은 자기 가속 놓아두고 남의 가속 우러르기 많으리라. 여자 자식도 열다섯이 되면은 자기 남편 놓아두고 남의 남편 우러르기 많으리라.”(정주병 본, <천지왕본풀이>, 1980)

그렇다면 소별왕이 이 세상을 차지함으로써 형제의 갈등은 봉인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창세신화는 형제의 갈등을 다른 방식으로 조절한다. 창세신화는 ‘공간의 분할’을 통해, 다시 말해 ‘저승’을 창안함으로써 갈등을 조절한다. 내기에서 진 착한 대별왕은 저승의 주인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그가 다스리는 저승은 ‘맑고 청랑한 법’이 있는 ‘좋은 곳’이다. 그래서 대별왕과 소별왕의 싸움에서는 패배가 승리가 되고 승리가 패배가 되는 역설이 설립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아니라 ‘저승이 좋다’는 신화적 패러독스가 구축된다. 이들 형제신 사이에 영원한 승패는 없다. 요컨대 음양의 순환이 있을 뿐이다.

창세신화의 갈등조절이라는 거울에 선악형제담을 비춰보면 어떨까? 선악형제담에는 공간 분할이 없다. 저승도 없다. 사건과 사건의 해결이 이승에서만 이뤄진다. 착한 아우의 불행은 지속되지 않고 마침내 ‘여기서’ 행복으로 역전된다. 반대로 동생의 눈을 찌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형의 행운은 동생의 행동을 모방하는 사이 불운으로 역전된다. 우리가 ‘행복한 결말’이라고 부르는 민담의 구조는 선과 악, 행운과 불운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우리의 무의식이 주조해낸 것이다. 현실과 의식에서는 그 균형이 깨져 있으므로! 창세신화의 거울에 비추니 저승이라는 공간의 창안 대신 호랑이와 같은 초자연적 환상을 끌어들여 현실의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민담의 전략이 드러난다. 그래서 선악형제담의 구조에 담긴 생각이 창세신화의 생각을 닮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경향신문

닌토쿠 천황


그렇다면 국가권력을 두고 형제가 다투는 왕권신화의 경우는 어떨까? <고사기>(712)에는 형제 갈등을 다룬 신화들이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 16대 닌토쿠(仁德) 천황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닌토쿠의 본래 이름은 오사자키노미코토(大雀命), 그는 이복동생인 우지노와키이라쓰코(宇遲能和紀郞子)와 왕위를 두고 다툰다. 그런데 이들의 다툼은 왕위 차지가 아니라 왕위 양보를 위한 다툼이었다. 오랜 세월 서로 사양하다가 동생이 죽어 형이 천황이 되었다는 미담이다. 동생이 자살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실상은 미담이 아니었겠지만 <고사기>는 나란히 배치한 추담(醜談)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렇게 꾸민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추담인가? 15대 오진(應神) 천황은 아들이 많았다. 부인 여럿이 낳은 배다른 형제들이다. 그 가운데 오사자키노미코토가 뒤를 이었는데, 그는 이복동생인 우지노와키이라쓰코에게 양위(讓位)를 결정한다. 여기까지는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미담이다. 그런데 새로운 인물이 끼어들면서 국면이 전환된다. 또 다른 이복형 오야마모리노미코토(大山守命)가 왕위를 노리고 아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느 왕조에나 있을 법한 역모가 천황가의 신화적 계보에서도 일어난다. 추담의 시작이다.

오사자키노미코토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우지노와는 하인을 변장시켜 왕처럼 높은 자리에 앉혀놓은 뒤 자신은 천한 뱃사람으로 위장한다. 병사들은 강변에 숨겨놓고 배를 타고 기다린다. 형 오야마도 병사들을 잠복시킨 뒤 옷 안에 갑옷을 감추고는 강 건너편에 있는 동생을 만나려고 배에 오른다. 배가 강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우지노와는 배를 기울여 형을 물속에 빠뜨린다. 그때 강변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린다. 반역자 오야마는 강물에 떠내려가 가와라노 곶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왕권을 두고 형제가 다툴 때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다. 그러나 남은 것은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비극은 패자 쪽의 결말일 뿐이다. 민담 같은 역전은 없다.

오진 천황의 배다른 자식들 사이의 싸움과 비슷한 이야기가 고구려에도 있다. 주몽과 대소의 대를 이은 투쟁담이 그것이다. 아버지 하백으로부터 쫓겨난 유화는 이미 주몽을 잉태한 상태였다. <삼국유사>의 주몽신화에 따르면 유화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동부여왕 금와를 만나 그의 궁실에 유폐된다. 유폐라고 표현되어 있으나 실상 유화는 임신 중에 금와의 새 부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몽은 동부여의 왕자로 탄생한다. 이뿐만 아니라 햇살과 새와 짐승들이 지켜준 알에서 태어난 데다 일곱 살에 스스로 만든 활과 살로 백발에 백중일 정도로 명사수였다. 금와왕의 애정이 쏠렸으니 대소 이하 배다른 일곱 형들과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형들의 살해 위협은 동부여 탈출의 계기가 된다. 물론 이 탈출이 주몽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건국하게 했지만 갈등은 그치지 않는다. <삼국사기>를 보면 금와의 뒤를 이은 동부여 왕 대소는 고구려에 집착한다. 대소는 주몽의 계승자 유리왕 28년에 고구려에 사대의 예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했고, 32년에는 침입했다가 격파당한다. 집착은 전쟁을 촉발했고, 대소왕은 유리왕을 계승한 대무신왕(무휼) 5년, 고구려와의 전투 중 피살되고 만다. ‘고구려본기’는 이 승리의 대목에 키가 9척이나 되는 거인에 얼굴이 희고 눈에 광채가 났다는 괴유(怪由)라는 신비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대무신왕이 출병했을 때 대소의 목을 베어오겠다고 자원했고 그렇게 한다. 동부여 대소의 비극이 주몽의 손자 대무신왕에게는 천신의 방조로 이룩한 복수극이었던 셈이다. 여기에도 승패의 역전은 없다.

왕권신화에서는 주인공의 선악이 문제되지 않는다. 왕권신화는 승자의 기록이고 승자의 신화이기에 이긴 쪽이 선일 뿐이다. 그러나 민담은 패자의 말이고 약자의 신화다. 그래서 민담에서는 처음에는 약자가 지다가도 마지막엔 승리한다. 착한 동생의 눈이 치료되고 부자가 되는 결말 형식은 약자를 지켜주는 민담의 헌법이다. 이 민담의 헌법은 창세신화의 거울 이미지다. 그래서 창세신화는 승패와 선악, 이승과 저승의 절묘한 균형을 이야기로 보여준다. 이 균형을 깨는 것은 늘 권력욕이고, 왕권신화는 권력욕의 서사화다. 그래서 형제 갈등담의 창문으로 들여다보면 한쪽에서는 창세신화가, 다른 한쪽에서는 민담이 왕권신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게 칼을 휘두르지 말라고, 그래 봐야 잠깐이라고!

▶필자 조현설

경향신문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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