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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기고]세금 폭탄론은 염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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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주택·고가주택 보유자에 대한 종부세 중과와 강력한 대출규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9·13 투기대책이 발표되자마자 ‘세금 폭탄’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보유세를 많이 올릴 거면 대신 거래세를 낮춰야 한다는 점잖은 훈수부터, 정책실패를 세금 폭탄으로 덮으려 하는 바람에 실수요자들만 죽어날 판이라는 거친 항의까지 모두 세금을 줄여달라는 얘기이다. 심지어 거래세를 낮춰 집을 팔고 빠져나갈 여지를 줘야 집값이 진정될 거 아니냐는 협박(?)까지 하고 있으니 너무나 염치없는 짓이다.

경향신문

세금이 부동산투기를 없애는 특효약도 아니고, 부동산시장이 과열됐다고 세율을 갑자기 많이 올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세금 폭탄’에 대한 비난은 얼핏 그럴듯하게 들린다. 게다가 과거에도 부동산투기를 잡겠다고 종종 ‘세금 폭탄’을 사용했지만 성공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 핵심 대책인 종부세 중과에 대한 기대도 별로 높지 않은 실정이다. 집값이 짧은 시간에 많이 오른 탓에 부동산시장도 일단은 숨을 고르며 지켜보겠지만 이번 대책의 투기진정 효과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야당과 일부 언론의 엄살과는 달리 ‘세금 폭탄’이 이렇게 힘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실은 세금 폭탄이 아니라 ‘세금 풍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집값은 단번에 몇 억원씩 오르는 데 비해 늘어나는 세금은 기껏해야 1000여만원에 불과한 데다, 임대사업자 등록을 하면 그마저도 상당부분 깎아준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 때 가구별 합산과세가 위헌 결정을 받은 뒤 종부세는 이미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투기세력에게 전혀 위협이 안 된다.

게다가 세금부과에는 시간이 많이 걸려 투기자금의 엄청난 기동력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당장 야당이 반대하니 국회 통과도 지켜봐야 하며, 설령 통과돼도 시행은 내년부터다. 공시지가도 매년 찔끔 올리면서 시가에 근접하는데 부지하세월이다. 게다가 공시지가를 현실화하기 위한 관계부처의 상호협조가 전혀 안돼 이런 식이라면 공시지가 현실화는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밖에도 ‘1가구 1주택’에 대해선 양도세 비과세 요건이 너무 느슨한 데다, 그마저도 시장상황에 따라 원칙 없이 오락가락한다.

그런데도 정부나 여당은 여차하면 좀 더 센 대책을 내놓겠다며 큰소리치고 있으니, 투기세력과 ‘밀당’을 즐기는 것은 아닌지 착각할 지경이다.

당장 서둘러야 할 일은 돈줄을 조이고 금리를 올려서 시장분위기를 바꾸고 자금흐름을 돌려놓는 것이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효과의 신속성과 광범위한 영향을 감안하면 지금이라도 단행해야 마땅하다. 금리 인상 주장에 대해 고려할 사항이 많다고 고민한다지만, 금리가 바닥이어도 실물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경기는 여전히 부진한데도 통화신용정책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부동산투기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보유세율을 OECD 수준으로 대폭 올리고 공시지가를 최대한 빨리 현실화하며 양도세 비과세 예외를 없애는 등의 조세정책 정비도 시급하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원칙대로 이번 기회에 주식, 미술품, 골동품, 종교인소득 등에도 모두 과세하면 복지재원 확충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저금리기조의 장기화에 따라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을 1000만원으로 낮추자는 재정개혁특위의 제안조차 조세저항을 핑계로 외면한 기획재정부는, “도대체 왜 (세제실의) 저 많은 공무원들이 매년 세금법규를 고치는지 모르겠다”고 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적에 대답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통화신용정책과 조세정책 등 거시경제정책을 바로잡는 것은 대표적인 ‘민생적폐’인 부동산투기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외환위기 이후 계층 간 양극화를 심화시켜 온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서도 시급한 과제다. 만일 현 정부가 끝까지 부동산투기에 대해 실효성 없는 립서비스만 한다면, 국민들은 민생문제에 관한 한 현 정부도 ‘적폐세력’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영섭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석좌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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