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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문화와 삶]김민기와 ‘지하철 1호선’, 그 한결같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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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돌아왔다. 1994년 첫 공연 후 2008년 4000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 그 작품이 10년 만에 다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원작자인 독일 그립스 극단의 내년 창단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된 걸 계기로 12월까지 열리는 100회 한정 공연이다.

경향신문

15년간 70만명이 관람했다는 이 공연을 처음 본 건 2000년대 초, 베를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였다. 독일 원작을 한국 상황에 맞게 번안했다는데, 독일 빛깔 전혀 없는 한국 정서에 자연스러운 우리말 노래여서 원작을 완전히 바꿨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뒤 2000회 기념으로 내한한 그립스 극단의 공연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무대도 노래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토록 베를린 느낌 물씬 풍기는 공연이 어떻게 서울의 풍속화로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분명 번안과 연출을 맡은 김민기의 힘이었다.

1970년대 저항문화의 상징이던 그는 당시 유행하던 미국 포크음악에 우리 정서와 노랫말을 녹여낸 작곡가였다. ‘아침이슬’ ‘상록수’ ‘친구’ ‘아름다운 사람’ ‘가을편지’ ‘백구’ ‘작은 연못’ ‘천릿길’ ‘날개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봉우리’ 등 1970~1980년대 수없이 불렸던 그의 노래들은 우리말에 내재한 선율과 리듬을 세심하게 천착한 결과였다. 한국 전통연희와 국악에도 눈을 뜬 김민기는 1974년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썼고, 점차 서사가 있는 음악극 작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8), 노래극 <개똥이>(1984/95)와 <아빠 얼굴 예쁘네요>(1987) 등은 군 제대 후 공장 근로자로, 농사꾼으로, 탄광 광부로 일했던 삶이 투영된 작품들이다.

1991년 학전 소극장을 맡은 후에는 극장을 운영하며 연출가로 활동해왔다. 그 첫 작품이 폴커 루드비히 원작, 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지하철 1호선>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이 작품의 자유분방한 형식에서 그는 마당극을 떠올렸다고 한다. 온갖 인간 군상들이 오가며 마주치는 지하철이야말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다루는 최적의 장소일 터.

김민기는 원작의 본질을 꿰뚫고 인물의 전형들을 파헤쳐 한국 상황에 맞게 탈바꿈시켰다. “원작을 뛰어넘는 각색”이라는 격찬에 1000회부터는 저작권료도 면제받았다. 독일저작권협회는 선례가 된다하여 반대했음에도 학전의 번안은 독립된 창작물이라며 원작자가 강력히 요청해 이뤄진 조치였다.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에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포착해 자국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창조해낸 김민기에 대한 원작자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었으리라.

<지하철 1호선>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그 후로도 계속된다. 폴커 루드비히의 그립스 극장도 김민기의 오랜 관심사였던 아동청소년 극으로 이름난 곳이었던 거다. <고추장 떡볶이> <모스키토> <우리는 친구다> 같은 학전 레퍼토리는 그립스의 원작을 번안해 올린 아동청소년 뮤지컬이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뮤지컬 시장은 스펙터클하고 세련된 무대와 화려한 스타 캐스팅으로 급성장했다. 다양한 소재와 형태의 뮤지컬이 넘쳐나는 요즘 10년 만에 옛 모습으로 돌아온 <지하철 1호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20세기 말 서민들의 고달픈 삶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감성이 여전히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가치는 바로 그 한결같음에 있다. 대도시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 그럼에도 버텨내는 삶의 긍정성을 전하는 진솔한 태도. 이는 김민기의 삶과도 닮았다.

그는 자신이 필요하다 여기는 것들을 묵묵히 실천해온 예술가다. 노래든, 연출이든, 극단 운영이든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양을 일구는 일에 매진했다. 씨를 뿌리고 모종을 키우며 언젠가 이들이 성장해 숲을 이루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이다. <지하철 1호선>이 IMF 시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담아낸 한 시대의 기록물이라면, 반세기에 걸친 김민기의 활동은 한국 현대예술사의 의미 있는 한 장면으로 자리매김해야 마땅하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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