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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Weekend Interview] 펜싱강국 이끈 `레전드`에서 亞게임 해설위원 변신한 원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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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국은 펜싱 강국이다. 원우영 선수는 한국 펜싱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올림픽,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에서 정상에 오르며 `펜싱 코리아`를 전 세계에 알렸다. 원 선수가 뚝섬역에 위치한 서울교통공사 펜싱연습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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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뚝섬역 5번 출구 앞에 위치한 서울교통공사(메트로) 펜싱훈련장. 벽면을 장식한 사진 속 한 사내가 몸을 한껏 기울인 채 날카로운 검으로 상대방 몸통을 노리고 있다. 사내의 등에 붙어 있는 'WON, KOR'란 글자가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사내의 이름은 원우영(36·서울교통공사).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펜싱 사브르 단체 결승에서 우승을 확정 짓고 포효했던 전 국가대표 주장 원우영이다. 사진은 시간을 정지시켰다. 그래도 세월은 흘렀고 어느새 런던올림픽을 달궜던 펜싱의 열기 역시 일반인들의 기억엔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펜싱 선수들에게 원우영은 명실상부한 '레전드'로 통한다. 201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펜싱선수권대회에서 남자 사브르 개인전 금메달을 차지했다. 남자 펜싱 사브르 종목에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 선수가 딴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유럽의 텃세에 막혀 한국 사브르는 국제대회에서 메달 하나 따기 힘들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그의 우승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원우영이 대표팀 주장으로 오은석, 김정환, 구본길 선수와 함께 일군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은 전 세계에 '팬싱 코리아'를 알린 쾌거였다. 펜싱 관계자들은 런던올림픽에서 깜짝 놀란 유럽이 한국 펜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2016년 체육인 최고 영예로 불리는 체육훈장 '청룡장(1등급)'을 받았다. '피겨 여제' 김연아 선수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들이 받은 상이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세계선수권·올림픽·아시아선수권·아시안게임)을 달성했고 이듬해 국가대표를 후배들에게 물려줬다. 이번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방송 해설자로 칼 대신 마이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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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런던올림픽 결승전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뒤 환호하는 원우영 선수.


한국 펜싱은 태권도·양궁과 함께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무더기 금메달을 선사한 '효자 종목'이다. 한국 펜싱이 아시안게임에서 딴 금메달 수만 2010년 광저우 7개, 2014년 인천 8개 등 모두 40개에 달한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8개의 금메달을 목표로 '금빛 찌르기'에 나선다. 특히 한국 펜싱 사브르 대표팀은 세계 최강이다. 김정환(35·국민체육진흥공단) 구본길(29·국민체육진흥공단) 김준호(25·국군체육부대) 오상욱(22·대전대)으로 구성된 사브르 대표팀은 세계랭킹 1위다. 사브르 대표팀은 지난달 25일 중국 우시에서 열린 대회 단체전 결승에서 이탈리아를 45대39로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 우승에 이어 2년 연속 우승이다. 하지만 한국 펜싱이 어떻게 세계 최고 실력까지 오르게 됐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펜싱은 여전히 비인기 엘리트 스포츠에 머물러 있다.

서울의 수은주가 40도에 육박하며 연일 한반도 폭염의 역사를 새로 쓰던 8월 초 한국 펜싱의 역사를 써온 원우영 선수를 만나기 위해 뚝섬역을 찾았다. 18일 개막하는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선 한국 펜싱의 성공 비결을 묻기 위해서다.

"자세~자세 낮추고! 더 빨리~더 빨리! 마르셰 팡트(Marche Fente·전진 공격)~롱프르(Rompre·후퇴)~."

서울교통공사 펜싱연습장의 대형 에어컨이 힘차게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훈련 열기까지 식히지는 못했다. 펜싱 선수들은 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메탈로 만든 마스크를 쓰고 두꺼운 장갑을 낀다. 방탄복 섬유 소재 케블러(Kevlar)로 만든 펜싱복은 입지 않고 그냥 보기만 해도 숨이 콱콱 막힐 것 같았다. 동료들과 훈련 중이던 원우영 선수도 그야말로 땀을 비오듯 쏟아냈다. 마스크를 벗은 원우영은 세계선수권과 올핌픽을 잇달아 재패한 검객이라기보다는 말끔한 얼굴의 부잣집 막내 도련님 느낌이다. 다만 역도 선수처럼 울퉁불퉁한 허벅지 근육이 그의 훈련량을 가늠케 해줬다. '칼'을 어떻게 잡기 시작했는지부터 물어봤다.

―펜싱은 어떻게 시작했나.

▷연희동에 있는 서연중학교 1학년 때다. 지금은 키가 184㎝이지만 당시는 154㎝로 또래 친구들보다 작았다. 덩치도 크지 않고 삐쩍 마른 체구였다. 축구를 좋아했다. 축구공을 차며 놀고 있는데 체육 선생님이 펜싱 한번 해볼 테냐고 물어보더라. 처음엔 펜싱이 뭔지도 몰랐다. 가서 보니 칼싸움하는 게 멋있어 보이더라.

―부모님은 운동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나.

▷처음에는 반대하셨다. 운동하다 몸도 다치고 운동선수의 길은 힘들다고. 아버지가 먼저 마음을 바꾸시더라. 아버지가 선생님을 찾아가서 펜싱을 시키겠다고 하셨다. 공부를 중간 정도하니 한번 펜싱을 시켜보자고 했다. 실제 펜싱을 시작했을 때 꿈도 '펜싱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중학교 펜싱부 생활은 어땠나.

▷서연중학교 펜싱부는 남달랐다. 당시 싸움도 1등이고 인기도 제일 많았다. 소위 '짱'이었다. 다른 세계 사람들 같았다. 무엇보다 펜싱이 너무 좋았다. 하루 종일 펜싱만 생각했다. 심지어 잘 때도 펜싱 칼을 꼭 껴안고 잤다. 비용은 월 10만원 정도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칼, 마스크, 펜싱복은 개인적으로 사야 했다. 펜싱이 귀족 스포츠라는 편견이 있지만 꼭 부자들만 하는 스포츠는 아니다.

펜싱은 플뢰레(Fleuret), 에페(Epee), 사브르(Sabre) 3종목이 있다. 검으로 '찌르기' 또는 '베기' 동작으로 상대를 공격해 점수를 얻는다. 플뢰레와 에페는 칼끝으로 찌르기만 허용된다. 사브르는 찌르기와 칼날로 베기도 가능하다. 공격 부위도 다르다. 플뢰레는 몸통 공격만 가능하다. 에페는 신체 모든 부위를 공격할 수 있다. 사브르는 몸통, 팔, 머리가 공격 부위다.

―처음부터 사브르를 택했나.

▷아니다. 플뢰레로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사브르를 정식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었다. 유럽 텃세가 심해서 한국 선수는 사브르가 안 된다고 할 때다. 당연히 사브르만 전문으로 하는 선수가 많지 않아 보통 플뢰레 선수가 사브르까지 두 종목 시합에 동시에 나갔다. 개인적으로 플뢰레나 에페의 세밀함보다는 스피드와 파워로 승부하는 사브르가 잘 맞았다. 또 찌르기만 하는 플뢰레, 에페보다는 칼을 휘두르는 사브르가 멋있었다. 사브르에 출전한 선수가 전국에서 30~40명 수준이어서 32강, 16강, 8강, 4강으로 4번만 이기면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대상 전국대회인 문화체육부 장관배가 첫 출전이었다. 거기서 사브르 2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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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영 선수는 평소에는 선한 눈매의 훈남이지만 펜싱 마스크를 쓰고 칼만 손에 쥐어지면 카리스마 넘치는 검객으로 변한다.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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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도 펜싱 명문인 홍익사대부속고로 갔다. 홍대부고의 체력훈련 방식이 독특했다는데.

▷매일같이 허벅지가 터져나갈 것 같은 고통이 올 정도로 훈련했다. 홍대부고는 성북동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특히 동계훈련은 체력훈련 위주로 진행됐다. 한성대입구역에서 언덕 위 홍대부고 끝까지 뛰어 올라갔다. 홍대부고 뒷길의 북악스카이웨이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뛰었다. 남들보다 운동신경이 좋고 빨리 뛰는 편이어서 20~25분이면 주파했다. 당시는 맞으면서 운동할 때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성적은 좋았나.

▷당시 홍대부고의 성적은 압도적이었다. 단체전은 홍대부고가 전관왕을 차지했다. 홍대부고 펜싱부가 20명 정도였는데 4명이 뽑히는 주전에 들기 위해 경쟁이 심했다. 1학년 때부터 주전을 꿰차고 단체전에 나가 우승했다. 2학년 때는 그해 첫 시합인 펜싱협회 회장배에서 개인전 우승을 했다. 3학년 때도 계속 우승을 했고 2000년 한국체육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펜싱으로 대학 진학이 꿈이었으니 꿈을 이룬 셈이다. 대학에서도 잘했나.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기대주였다. 1학년 때 성인 대회에 출전해 메달을 땄다. 선생님뻘 선수들이 출전하는 오픈선수권에서 메달을 따서 청소년 대표가 됐다. 국제대회에 나가서 당시 우리나라 최고 기록인 단체전 4위를 했다.

―엘리트 선수의 평탄한 성장일기 같다. 위기나 슬럼프는 없었나.

▷어려서부터 영광이 컸던 만큼 그림자도 길었다. 청소년 대표와 유니버설 대표에는 선발됐지만 대학 때 국가대표팀에 들어가지 못했다. 슬럼프가 왔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이유는 뭐였나.

▷국가대표 선발 과정이 석연치 않고 심판도 편파적으로 판정한다고 생각했다. 사브르는 심판의 영향력이 크다. '이런 불이익을 받고 운동은 뭐하러 하나' 하는 생각에 다 그만두려 했다. 심판의 판정에 '트라우마'가 생기기 시작했다. 심판이 조금만 석연치 않은 판정을 할 경우 마음과 게임이 모두 엉클어졌다. 경기 중 어깨가 빠지는 부상도 있었다. 이후 팡트(찌르기 공격)만 깊게 쏘면 어깨가 빠지더라. 사브르 선수는 공격을 해야 하는데 수비만 하게 되니 개인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들었다. 그해 11월 시즌이 끝나고 수술을 했다.

―부상으로 경기력이 떨어진 것은 아닌가.

▷대학교 3학년 때인 2002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 나가 개인전 1등을 했다. 당시는 국가대표가 아니어도 아시아선수권에 나갈 수 있었다. 세계 무대 경험을 쌓고 싶어 자비로 출전했다. 잘하다 보니 국가대표 욕심이 생기더라. 하지만 결국 대학 때는 국가대표에 선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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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나.

▷어머니가 용기를 주셨다. 좌절하지 말라고. 펜싱 훈련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 친구들도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줬다. 언젠가 대표팀에 들어가 빛을 볼거니 좌절하지 말라고 했다. '그만두면 아깝다' '우리나라가 인재를 잃는 것'이라고 말해준 것이 도움이 됐다.

―국가대표엔 어떻게 선발됐나.

▷대학 졸업과 함께 2004년 실업팀 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로 들어왔다. 당시 이병남 메트로 감독이 '너 정도 실력이면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다'면서 심판 판정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등을 하고 그해 겨울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됐다. 펜싱 인생 2막이 열린 셈이다. 그 후 2015년 세계선수권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할 때까지 11년을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국가대표 생활은 힘들지 않았나.

▷지금은 선수촌이 충북 진천에 있지만 당시는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선수촌에서 국가대표들은 새벽·오전·오후·야간 하루 4번을 연습한다. 눈 뜨면 운동하고 밥 먹고 잠시 쉬었다 운동하고를 반복한다. 몸이 안 만들어질 수가 없다.

―펜싱 사브르에선 유럽 텃세가 심했다고 했는데.

▷양 선수가 동시에 찌르면 두 선수 모두에게 점수를 주는 에페와 달리 사브르는 공격권과 수비권이라는 게 있다. 공격권을 가지고 있는 선수의 득점만 인정된다. 누가 공격권을 쥐고 있는지는 동작을 보고 판단한다. 심판들 눈높이는 유럽 선수들 동작에 맞춰져 있었다.

―한국 펜싱은 어떻게 대응했나.

▷펜싱 지도자들이 오랜 기간 꾸준히 유럽 펜싱을 연구하며 노하우를 쌓았다. 개인적으론 2006년 토리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사브르 개인전 동메달을 따면서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64강·32강에서 탈락했는데 세계 무대 경험을 쌓으면서 부담감은 없어지고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국제 무대에서 한국 펜싱이 강해진 비결이다. 펜싱 대표팀 후원사인 SK텔레콤의 꾸준한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동작을 많이 연습했나.

▷마르셰 팡트라 불리는 전진 공격이다. 전통 유럽 펜싱은 수비에 치중했다. 공격해오는 칼날을 막고 찌르는 '파라드 리포스트' 동작을 많이 했다. 하지만 사브르 종목은 공격하는 선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특히 2005년부터 펜싱 규칙이 바뀌면서 파라드(막기)로 점수를 따기가 힘들어졌다. 사브르 선수들에게 '아타크(공격)'를 요구하는 이유다. 길게, 힘 있게 공격하고 상대방이 빠지면 따라 들어가 때리는 방법이다. 실제 경기에서도 수비는 거의 안 했다. 무조건 공격으로 점수를 많이 얻었다

―결국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개인전에서 메달을 기대했는데 16강에서 졌다. 단체전은 기대를 하지 못했다. 8팀이 본선에 출전했는데 한국은 그중 7위였다. 팀의 주장으로서 선수들에게 '무조건 아타크다. 절대 뒤로 빠지지 말자'고 주문했다. 우리만큼 훈련을 많이 한 팀이 없었다. 정말 운동량만큼은 세계 최고였다. 특히 런던올림픽을 앞두고는 4~5개월간 외출·외박도 못하고 계속 태릉선수촌에서 강훈을 했다. 상대 선수들 경기를 비디오로 철저히 분석했다. 열심히 하면 안 될 수가 없다고 믿었다. 그동안 준비한 시간을 헛되게 하지 말자는 간절함도 있었다.

―주위에선 아직 국가대표급 실력이라는데.

▷런던올림픽 이후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 꼭 나가고 싶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만 따면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후 2015년 세계선수권대회까지 뛰고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대표선수를 오래하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국가대표에서 나오니 홀가분했나.

▷허전하더라. 태릉선수촌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를 받으며 10년 넘게 있었는데 이제는 혼자 스스로 관리해 나가야 하는 허전함이 밀려오더라.

―펜싱은 용어나 룰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현대 스포츠 펜싱의 토대가 프랑스 검술이다. 펜싱경기가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이유다. 몇 가지 용어만 알아도 이해가 쉬워진다. 경기는 심판이 앙 가르드(en garde·준비)와 알레즈(allez·시작)를 외치면서 시작된다. 영어의 '터치'에 해당하는 투셰(touche)를 얻으면 공격에 성공해 득점한다. 이외에 공격을 의미하는 아타크(attaque), 방어를 의미하는 파라드(parade), 반격을 의미하는 콩트르아타크(contre attaque) 등의 용어를 자주 듣게 된다. 개인전은 3분, 3바우트(bout)로 진행되는데 15점을 먼저 얻는 선수가 승리한다. 단체전은 45점을 먼저 따내거나 27분이 지났을 때 점수가 앞서는 팀이 승자다. 선수들은 메탈조끼를 입고 있어 전선이 삽입된 펜싱칼이 닿으면 불이 들어와 득점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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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싱은 유독 심판 판정에 대한 어필이 많다.

▷펜싱의 검은 눈보다 빠르다. 특히 올림픽에 나오는 정상급 선수들의 칼은 육안으로 판단하기가 힘들 정도로 빠르다. 심판도 누가 공격권을 가졌는지 애매할 때가 있다. 비디오판독이 도입되면서 판정 시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선수들은 여전히 자신이 이겼다고 소리를 질러 심판에게 어필한다. 펜싱 세부 종목이 잘 구분이 안 될 때는 양쪽 선수가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심판을 향해 자기가 이겼다고 외치면 '사브르' 종목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야구 메이저리그에선 상대방 투수나 타자의 폼을 연구해 대응한다. 펜싱에서도 상대방의 습관을 연구하나.

▷칼을 쓰는 동작을 연구한다. 같은 동작에서 어떻게 쏘고, 어떻게 막는지를 분석한다. 하지만 알고도 당하는 게 펜싱이다. 그래서 흥미롭다.

―검도는 호신술로도 이용된다. 펜싱을 배우면 자기 방어가 되나.

▷진짜 칼을 들어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칼을 들려주면 일반인들과는 다르지 않을까(웃음).

―한국 펜싱은 아직 선수층이 얇고 몇몇 선수에 의존하는 엘리트 스포츠다.

▷처음 사브르를 시작했을 때 전국에서 모인 선수가 30명 정도였다. 여기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금메달이 나온 거다. 이제는 국제 무대에서 한국 펜싱이 선전하면서 선수층이 예전보다 두꺼워졌다.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도 많아졌다. 펜싱협회와 후원사인 SK텔레콤이 열심히 잘하고 있는 덕분이다. 하지만 펜싱부를 둔 대학이 많지 않아 고등학생들이 펜싱으로 대학에 가는 길이 아직은 좁다. 또 펜싱으로 국군체육부대(상무)에 들어가지 못하면 선수 생명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한국 펜싱이 사회체육으로 좀 더 많은 일반인에게 다가설 수 있으려면.

▷좀 더 적극적인 언론 노출, 홍보가 필요하다. 대회 때만 바짝 관심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펜싱 클럽이 아직은 많지 않다. 일반인들이 생활체육으로 어디서든 펜싱을 즐길 수 있도록 클럽이 많이 생겨야 한다.

―펜싱은 돈이 많이 드는 귀족 스포츠라는 편견이 있다.

▷비싼 클럽도 있지만 저렴하게 펜싱을 즐길 수 있는 클럽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에서도 일반인들이 무료로 체험할수 있는 무료펜싱 교실을 1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다른 팀에도 무료 체험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 펜싱을 경험해보는 시민이 늘었으면 한다.

―일부 학부모들은 펜싱을 아이비리그 같은 미국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한 도구로 접근하는 것 같다.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펜싱을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런 게 모두 기회고 펜싱을 배우는 하나의 동기가 된다. 실제 하버드대나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입학 사정 담당자들이 각 학교를 대표할 펜싱 선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미 전국 대회를 유심히 보러 다닌다. 한국에서 열심히 뛴 고등학생들 실력이면 미국에선 펜싱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다. 실제 3~4년 전쯤 한국 고등학교 선수들이 미국 전국대회에 나가 상위권을 휩쓸었다. 그만큼 한국 선수들 경쟁력은 뛰어나다.

―외국에선 한국 펜싱 스타일을 풋워크가 좋은 '발 펜싱'으로 규정한다. '발 펜싱'은 국제 무대에서 언제까지 통할까.

▷한국 펜싱은 강인한 체력훈련을 통한 폭발적인 스피드를 갖춘 풋워크를 자랑했다. 그동안 한국 펜싱의 압도적인 속도를 유럽 등 상대 국가에서 많이 연구했다. 그들이 한국 펜싱의 움직임은 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공격을 하면서 상대방을 속이고 점수를 따는 한국 펜싱만의 노하우가 있다. '발 펜싱'이라고 하지만 최근 한국 펜싱은 손도 잘 쓴다.

―한국 펜싱을 배우러 해외에서도 전지훈련을 온다고 들었다.

▷외국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의 움직임만 알지 한국 대표팀이 훈련하는 방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는 점수를 연속해 득점하는 방법을 안다. 국가대표 후배들에게 이렇게 점수를 따는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선배들 역할이다. 런던올림픽 당시 국가대표 막내 선수들이 이제는 큰형이 됐다. 한국 펜싱은 정말 잘한다. 이제 국제대회에서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 펜싱을 무시하지 못한다. 이제는 우리나라 선수들 움직임에 심판들이 눈높이를 맞춘다. 우리가 '이겼다'고 외치면 심판들이 무시하지 못하고 이긴 건가 살펴볼 정도다. 한국 남자 사브르는 계속 세계 최고의 팀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 후배들과 함께 일군 런던올림픽 단체전 우승이다. 당시 단체 결승전에서 45대26으로 루마니아를 꺾었다. 한국의 동·하계 올림픽 통산 100번째 금메달 획득이라 의미가 더 컸다. 아시아 팀이 올림픽 펜싱 사브레 단체전에서 우승한 건 처음이었다.

―앞으로 개인적인 계획은.

▷육상으로 치면 사브르는 '단거리'다. 선수 생명이 상대적으로 짧다. 지도자의 길을 걸을 계획이다. 지금 재직 중인 서울교통공사에서 코치하면서 기회가 되면 지도자로서 후배 양성과 펜싱 저변 확대에 힘이 되고 싶다. 평생 펜싱을 하며 그동안 받아온 것을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원우영 선수는

▷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펜싱 선수다. 1982년 생으로 서울 서연중학교 1학년 때 '칼'을 잡기 시작해 홍익대부속고등학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 펜싱의 유망주였지만 국가대표 탈락, 부상 등으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시련을 이겨내고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이어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펜싱 선수 최초의 '그랜드슬램'이다. 아시아 선수 최초로 2010년 세계선수권대회 사브르 개인전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펜싱'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도 서울교통공사 소속으로 방송 해설위원 겸 대한체육회 선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해설자로 활약한다.

[김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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