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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단아한 한국美 담아… 안팎 경계 허물어 모두가 즐기게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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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설계자, 英 건축가 치퍼필드·펠거 인터뷰

"안과 밖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한옥의 건축정신 녹아내리게"

"우리가 의도한 대로예요." 지난 15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3층 난간에서 사람들로 붐비는 1층을 내려다보던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65)씨가 말했다. "토요일에도 온 적 있는데, 그날도 오늘처럼 붐볐어요. 일주일 내내 직원 아닌 사람이 이렇게 많이 다니는 사옥은 거의 없을 겁니다."

치퍼필드씨는 자신이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과 함께 일하는 디자인디렉터 크리스토프 펠거(51)씨와 함께 지난주 한국을 찾았다. 이 사옥에는 아모레퍼시픽과 삼일회계법인 등이 작년 말부터 차례로 입주를 시작해 최근 입주를 마쳤다. 런던, 베를린, 밀라노, 상하이에 사무소를 둔 치퍼필드씨는 2007년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가 수여하는 스털링상을 받고 2010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와 이 건물을 함께 설계한 펠거씨는 치퍼필드씨와 20년째 함께 일하는 건축가다.

조선일보

서울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을 설계한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오른쪽)씨와 크리스토프 펠거씨가 사옥 5층에 있는 정원에 함께 섰다. 치퍼필드는 “서울을 둘러보며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도 곳곳에 초록빛 자연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라며 “이 정원이 앞에 있는 용산가족공원과 어울렸으면 한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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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달항아리를 본떠 설계했다'고 알려졌지만, 치퍼필드씨는 "달항아리가 직접적 모티브는 아니다"라고 했다. "만약 그랬다면 건물이 백자처럼 둥글었겠죠. 달항아리는 '건물에 담으려 했던 단아한 한국의 미(美)란 이런 것이다'고 설명하기 위한 거죠. 마침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백자를 소장하고 있기도 하고요."

실제로 이 건물은 백자를 닮지 않았다. 곡선 하나 없는 정육면체 모양이고, 알루미늄 루버(벽면에 수직으로 부착한 차광판)가 뒤덮은 외벽은 매끈하지도 않다. 루버 안쪽은 통유리다. 펠거씨는 "만약 이 알루미늄 커튼이 없었다면 그저 평범하고 어두운 유리 빌딩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유리가 투명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유리 외벽은 낮에 굉장히 어둡습니다." 그는 "한옥은 안과 밖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건축양식"이라며 "건물을 알루미늄으로 두른 것은 한옥처럼 내·외부의 경계가 자연스레 녹아내리게 하려는 의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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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준공식을 연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건물 안에 큼직한 정원들이 들어서 있다. /아모레퍼시픽


치퍼필드씨는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지역사회가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1층 사방에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크게 출입구를 낸 것도 그 이유다. 펠거씨는 "빛을 중시한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건물 안에 정육면체 모양의 큼지막한 정원을 세 개 만들어 햇볕을 쬘 수도 있고 정원을 통해 사무실 깊숙한 곳까지 볕이 든다. 밤에는 건물이 하얗게 빛난다.

치퍼필드씨는 "앞으로 이 일대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어 더 어려웠다"고 했다. 건물이 지어지는 동안 용산에 고층 빌딩이 여럿 들어섰고 지금도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서울은 파리나 런던에 비해 무작위성이 강합니다. 계획된 도시가 아니라 그렇겠죠. 그래서 '이곳엔 이런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단서를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사옥이 '치퍼필드의 건물'이 아니라 '서울의 건물'로 남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렬한 언어로 자전적 건축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제 견해는 다릅니다. 건물은 고유한 정체성을 갖되, 그 정체성은 주변과 어울리며 건축주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좋은 건축주를 만나서 나온 작품'이란 말을 듣는다. 치퍼필드씨는 서 회장이 프로젝트에 미친 영향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짓지 않아도 될 사옥이었지만, 서 회장의 의지는 그야말로 필요 이상이었습니다. 상업적 프로젝트임에도 사회적 의무에 대한 생각도 강했고요. 정말 이례적인 건축주였고 제겐 행운이었습니다."

[김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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