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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말은 못해도 욕은 한다···인류와 함께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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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 커버스토리

대한항공 이명희 욕설

대표적인 갑질 폭력

욕은 카타르시스이기도 해

평범한 언어는 상위뇌, 욕은 하위뇌가 관장

인류·역사와 함께해 왔지만 '오남용'은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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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이름은 ‘욕’이야. 최근 인기를 끈 그 녹취 파일은 내 독무대였어. 주어도 나였고, 서술어도 나였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한항공 일가인 이명희씨와 조현민씨였는데, 대단히 찰기 있고 ‘스웨그(swag·힙합 뮤지션의 허세 있는 멋)’ 넘치게 나를 구사하더라. 그들은 그 실력을 직원들한테 수시로 뽐냈대. 이씨의 전직 수행 기사는 말했어. “하루를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끝냈어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야말로 대한항공 사태의 불쏘시개였어. 내가 원래 좀 화끈하거든. 누구랑 어디에 있건 관심 끌기에 최고지. 생각해봐. 내가 난무하는 싸움치고 구경꾼 안 모여드는 곳, 어디 있나. 지금도 유튜브에는 수십만 건씩 조회되는 ‘욕 배틀’이 넘쳐나고,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욕설 피자가게’는 또 얼마나 ‘핫’했게? 손님한테 준 영수증에 ‘말귀 못 알아 처먹는 진상 할배’라고 썼다지?

알다시피 난 특별한 말이야. 평범한 말과는 다르지. 사람들의 반응부터가 다르잖아.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어. 관장하는 뇌의 영역이 다르거든. 평범한 언어는 ‘상위뇌’, 즉 합리적 사고와 자발적 활동을 책임지는 대뇌피질 영역에서 다루는 반면, 나는 ‘하위뇌’, 즉 감정과 자율신경계를 통제하고 심장박동수와 혈압을 조절하는 변연계에서 다루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뇌졸중으로 언어 능력을 거의 잃은 와중에도 나를 까먹지 않았던 건 그래서야.

자, 내가 여러분 면전에 쏟아진다고 치자. 얼굴이 달아오를 거야. 혈압과 맥박도 상승할 거고. 심리상태는 둘 중 하나겠지. 위축되거나, 분노하거나. 위축되건 분노하건 기저에 깔린 감정은 동일해. 수치심과 모욕감이지. 그래, 그게 바로 성기를 응용한 내가 많은 이유이자, ‘똥물에 튀겨 죽일’이라거나 ‘개 같은’, ‘머리통을 박살 낼’ 같은 내가 만들어지는 이유야. 은밀한 부위를 조롱하고, 배설물과 짐승에 비유하고, 신체 훼손을 암시함으로써 수치심과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지.

천박하고 불경하다고? 꽃 같은 말만 해도 부족한 인생이건만, 왜 나를 쓰는지 모르겠다고? 글쎄, 그렇게 욕만 하려 들지 말고 내 긍정적인 면도 좀 봐주면 안 될까? 사회 통념상 나쁘게 인식되면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가 없는 시대, 내가 없는 나라는 없었어. 고대 로마에서도, 성서의 시대인 중세에도, 세계대전으로 많은 이가 언어를 잃어버렸을 때조차 나는 늘 흥했다고. 왜 그랬을까? 무슨 쓸모가 있었기에?

나만큼 극도의 분노, 혐오, 적대감 같은 극단적인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언어는 없어. ‘정말 나쁜 사람’과 ‘X놈의 새끼’가 같을 순 없지 않겠니? 전자가 포장하고 에두른 ‘문화인’ 같은 표현이라면, 후자는 까발리고 발산하는 원초적 표현이야. 지시 대상이 같을 때, 쓰는 입장에서 후련한 쪽은 당연히 후자지. 나를 뱉는 과정에서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지면서 스트레스가 해소돼. 잘 모르겠다고? ‘욕먹어도 싸다 스트레스 해소 질러버리자’라는 앱을 추천해.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사람, 마음껏 욕할 수 있는 앱이야.

나를 쓰면서 친밀감을 높이는 경우도 있어. “야이 자슥, 잘 있었나”, “야이 잡것아”라고 하며 툭툭 치는 사람들이 그래. 이들은 더 심한 나를 허용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만큼 허물없이 가깝다’는 심리에서야. 이뿐이니? 사회를 비판? 풍자할 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통풍구 역할까지 하는 존재가 나라고. 코미디 프로그램과 각종 패러디에 나오는 해학적인 욕이나, 어르신들이 티브이나 신문을 보다 말고 ‘망할 놈의 세상’, ‘세상 꼬락서니’ 운운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하지.

아, 한풀이가 길었다. 나한테도 장점이 있다고 항변하긴 했지만, 오남용은 금물인 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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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든 대인 관계를 망가뜨릴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대한항공 일가처럼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욕일수록 애초에 내가 품은 능멸과 무시의 함의가 더 커지기에 ‘갑질’의 끝판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라. 오늘날 특정한 인종, 성별, 장애 등을 비하하는 멸칭은 성적인 욕보다도 금기시된다는 사실도 유념하는 게 좋겠지. 그동안 나 때문에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은 모쪼록 욕했다가 욕먹는 일 없기를 바랄게!

글 강나연 객원기자 nalotos@gmail.com, 도움말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 참고자료 , 논문 <욕의 교육인간학적 기능>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또는 남을 저주하는 말. 이명희 일우재단 전 이사장과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녹취 파일에 다량 포함돼 이른바 ‘대한항공 갑질 사태’를 촉발했다. 주로 분노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며, 사용자 입장에서는 그로 인해 억압된 감정을 해소하는 효과도 있다. ‘ㅆ, ㄲ, ㅍ, ㅃ, ㅊ’ 등 거센소리가 많이 들어간다. 어원을 신체적 결함이나 질병, 특정계층 비방, 성적인 것에 두는 경우가 많고, 지나친 욕설은 대인관계를 망가뜨릴 수 있기에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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