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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어린양을 안고 ‘바람’의 등에서 눈물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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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16) 길 잃은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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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이 온 키르기스 초원에 목초가 자라고 있다. 아이다르가 여름을 나기 위해 양떼를 몰고 도착한 하영지(여름 목장) 뒤로 파미르고원의 설산이 보인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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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일, 크즐강. 다리 위에서 내 말 바람이 잔뜩 겁을 먹었다. 붉은 강물이 교각을 때리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폭포수처럼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상류 쪽 100m 지점에 대형 트럭이 다니라고 만들어놓은 철교 위를 붉은 물이 기어올라와 휘감았다. 바로 어제 맑은 물이 흘렀는데, 단 하루 사이 온도 1도 때문에 강물이 변했다. 이제 빙하 아래 자락이 녹는 시간, 곧 더 큰 범람이 일어나리라.

하나 일가족을 실은 당나귀와 말과 트럭이 하영지로 떠나지만, 나는 너무 늦게 시작한 키르기스어 때문에 아직 발이 묶여 있다. 대신 아침이면 바람과 함께 나와 강을 건너는 행렬을 돕는다. 6월2일, 붉은 물을 본 당나귀 한마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꼬마 주인이 아무리 고삐를 당기고 채찍을 휘둘러도 꼼짝하지 않는다. 내 큰 말로 당나귀를 위협하고 끌어봐도 요지부동, 결국 어른 셋이 되돌아와 들다시피 해서 옮겼다. 그러다 종종 가축을 잃기도 한다. 다시 물이 맑아질 때 녀석은 한뼘 더 커서 돌아오겠지만, 놈에게 그 핏빛 강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처럼 보였나 보다. 하긴 재작년에 다리가 무너져 붉은 강이 말 여러 마리를 삼켜버렸다고 한다.

나의 낮과 밤 사이, 현실과 관념 사이에도 그런 붉은 강이 흐른다. 턱없이 큰 목표와 상상과 뒤죽박죽 섞인 개념들이 전투를 벌이는 밤의 관념 세계는 느리게 지나가고, 자잘한 당면 과제와 시시한 투쟁으로 가득 찬 하루는 화살처럼 지나간다. 정리되지 않은 개념과 싸우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나는 붉은 크즐강을 건너 일상으로 들어간다. 또 밤이 되어 일상을 관념과 연결시키려 발버둥치지만 일상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선명하고 소소한 것들이라 어떤 범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6월3일 만난 그 깜둥이 새끼 양도, 내 윗도리에 지린 비릿한 오줌 냄새와 몽글거리는 몸의 감촉과 체온의 기억으로만 가슴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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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길을 잃었다가 무사히 구출돼 가족 곁으로 돌아간 검은색 어린양.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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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이 따뜻했던 새끼 양

넓고 풍요로운 목장 투르파르켈 입구에 하영지를 두고 엄청난 양 무리를 거느린 아이다르는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눈매가 곱고 선한 친구다. 내 말이 풀을 뜯을 곳이 없을 때 그는 자기 하영지 안의 공간을 내줬다. 바람은 오십리 길을 매일 달려 목장으로 출근한다. 아이다르의 양이 구름처럼 이리저리 움직일 때 나는 말이 풀을 뜯는 곳에서 책을 읽고 연필로 글을 쓴다. 깜둥이를 만난 날은 볕은 좋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하긴 여기서 바람 없는 날은 없다.

검은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아이다르의 양 군단이 지나가고 반시간쯤 지났을까, 책장 너머로 새까만 것이 꼬물거렸다. 새끼 양이었다. 여기는 아이다르의 하영지, 분명 아이다르의 양이다. 하지만 새끼 양이 왜 여기 있을까? 아뿔싸, 너무 어려서 길을 잃은 것이다. 다행히 녀석은 말과 사람 냄새를 찾아왔다. 그날 말 세마리가 각자 한 골짜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다르의 수말과 어디서 온 암말 한마리 그리고 나의 바람이다.

녀석은 우리 곁으로 왔지만, 이내 낯선 존재임을 알고 겁을 먹고 발길을 돌렸다.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안장을 올리고 바람과 함께 녀석을 쫓았다. 1㎞ 거리에 있는 녀석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바람은 양몰이 경험이 있지만 두달도 안 된 듯한 젖먹이는 방향을 감지하지 못한다. 아무리 북쪽으로 몰려고 해도 새끼 양은 정신없이 방향을 틀다 언덕으로 오른다. 바람은 말을 잘 듣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나름대로 새끼 양을 모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덕에 오르자 왼쪽 계곡의 암말과 그다음 골짜기의 야트막한 구릉에 있는 수말이 눈에 들어왔다. 배불리 먹은 바람은 곧장 암말에게 눈이 팔려 울어댄다. 그사이 새끼 양은 너덜 지대로 달아난다. 나는 말에서 내리고 말뚝을 땅에 박았다. 경황이 없어 그냥 대충 발로 밟았으니 바람이 힘을 쓰면 뽑힐 것이다. 바람에게 당부했다.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새끼 양은 갈등하고 있었다. 사람과 말을 찾아갔지만 막상 그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르고 달래 놈을 세우지만 막상 다가가면 또 달아나니, 널찍한 개울의 미꾸라지처럼 잡기 쉽지 않았다. 주력을 다해 쫓아갔지만 놈은 본능적으로 방향을 끊임없이 바꾸었다. ‘저러다 탈진해서 죽으면 어떡하지?’ 물론 해발 3400m 고지에서 달리는 내가 먼저 탈진할 판이었다. 게다가 ‘바람 녀석이 암말 쪽으로 달려가면 어떡하지, 수컷과 싸우러 가면 어떡하지’ 갖은 걱정 때문에 놈이 달아날수록 불안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네발 달린 놈이라도 놈은 간난이. 태어나자마자 고소에 적응한 것은 아니겠지. 개활지로 몰아 사력을 다해 쫓았다. 지금 잡지 못하면 저 하늘 위에서 빙빙 돌며 우리는 감시하고 있는 검은 독수리가 내려오겠지. 독수리가 놈을 놓아주어도 물 없는 곳에서 탈진한 녀석이 오늘 밤을 못 넘기리라. 거대한 파도 같은 구릉이 시야를 완전히 가린 이 광막한 고원에서 아무리 뛰어난 목동도 까만 점같이 작은 놈을 찾을 도리는 없다. 기어이 놈을 잡았을 때, 맥박은 거의 최고조에 달하고 머리로 피가 공급되지 않아 정신이 아득했지만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녀석을 윗도리에 조심스럽게 싸고 머리만 밖으로 내었다. 너무 어려 눈을 가리면 쇼크사할 것 같았다. 바람을 찾아갔더니 다행히 놈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일말의 의리는 있는 놈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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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지 가는 길에 눈 녹은 물로 불어난 강이 무서워 다리 앞에서 되돌아서는 당나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어른 네댓명이 당나귀를 안아서 다리를 건넜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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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두번 떨어뜨렸던 ‘바람’의 변신

그러나 양을 안고 말에 오를 도리가 없었다. 바람은 어깨가 내 키만한, 이 초원에서 제일 큰 놈이다. 애꿎은 그놈을 원망했다. ‘말도 안 듣는 것이 키만 커서.’ 바위 쪽으로 데려가서 올라타려 하니 이놈은 이제 저쪽 수컷과 신경전을 벌이며 당장 달려나갈 기세다. 계속 움직이는 통에 말에 오를 수 없는데 양이 꼼지락거림을 멈추는 것 같아서 나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바람에게 양을 보여주며 설득했다.

“제발 움직이지 마, 조금 있으면 요게 놀라 죽을 거라고. 너도 엄마 두고 여기에 왔잖니, 응?”

바람은 새끼 양의 냄새를 맡고 한번 핥더니 정말 기적처럼 딱 멈췄다. 어떻게 안장으로 기어올랐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허리에서 툭 하는 소리가 나며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반 이상은 성공한 셈이다. 한손으로 양을 안고, 한손으로 채찍과 말뚝을 움켜쥐니 고삐를 잡을 손이 없었다. 양은 기름 바른 커다란 타조알처럼 미끈거리고, 게다가 꼬물거렸다. 새끼손가락에 고삐를 걸고 다시 빌었다. 바람은 구릉지 내리막길을 뛰어내려가 그 탄력으로 언덕을 오르는 버릇이 있다. 놈이 뛰면 양이 떨어지거나 우리가 떨어진다. 한데 넘어야 할 구릉이 열개도 넘었다. 다시 놈에게 애원했다.

“바람, 니가 뛰면 애기가 떨어진다. 형도 죽을 만큼 다치겠지. 천천히 걸어가줘, 알겠지?”

고삐를 새끼손가락에 걸고 말로 ‘워워’ 하는데, 그날 두번째의 기적이 일어났다. 바람이 언덕을 반보 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 녀석이 그렇게 걷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사실 그놈은 여기서 가장 말을 듣지 않는 말이고 나는 가장 미숙한 기수다. 놀라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이놈이 상황을 알고 있구나.’

키르기스의 가없는 초원
무리 놓친 어린양 한마리
생명 냄새 따라 왔으나
낯선 사람과 말에 놀랐구나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여린 생명 품에 안았더니
암말에 흥분했던 말도
순한 양처럼 변했구나


‘너도 상황을 다 아는구나’
말 주인 눈에 눈물 고였다


녀석은 암말에게서 완전히 눈을 떼고 한걸음씩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축 늘어져 있던 양이 옷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린다. 녀석의 심장 소리도 서서히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줌을 지려서 옷이 촉촉하고 비릿한 냄새가 난다. 그동안 바람은 거의 혼자 힘으로 하나하나 구릉을 넘어 아이다르의 양 우리를 찾아갔다. 마침 아이다르가 밖에 있다 우리를 보고 다가왔다. 그는 양을 잃은 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양을 건네자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고맙다. 밥 먹고 가라.” “늦어서, 오늘은 그냥 간다.”

옷에서 풀려난 양은 언제 자기가 허둥댄 적 있냐는 듯이 엄마 찾아 우리로 쪼르르 달려간다. 그사이 아이다르가 내 안장끈을 고쳐 매 주었다. 그날 바람을 다시 봤다. 이놈이 정말 나를 두번이나 떨어뜨린 그놈, 암말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그놈 맞을까? 지금까지 사리모골 노인들은 언제나 이방인인 나와 저 커다란 말의 안전을 걱정한다. 하지만 이제 걱정을 좀 덜 것이다. 초원에서 우리 둘이 길 잃은 양을 구했다고요. 눈과 우박이 내리고 바람이 몰아쳐도 목동은 길을 나서야 한다. 수백마리 짐승을 굶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살피지 않으면 짐승은 금방 줄어든다.

그날 바람은 오십리 폭의 초원을 단 한번만 쉬고 건넜다. 고분고분하진 않지만 잠재력은 무한한 놈이다. 제 기분만 좋으면 기관차처럼 묵직하게 달린다. 크즐강의 붉은 물은 오후 늦게 훨씬 불어나 있었다. 강을 건너면 일상을 까맣게 잊고 다시 개념들과 씨름을 벌여야 한다. 나는 지금 유목국가의 형성에 대한 기존의 개념들을 조금이라도 넘어서고자 고민하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적절한 사회적인 진화적 단계에 도달했고 적절한 정치조직을 갖고 있으며, 그 주민의 대다수가 유목민으로서 지배계층·계급과 피지배계층·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독자적인 사회조직체일 경우에,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유목국가라 부를 수 있다.”(하자노프, 김호동 역)

유목국가에 대한 오해

여기서 ‘적절한 사회적인 진화적 단계’는 계급 분화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 듯하다. 사회의 진화적인 단계의 완성체는 지금까지는 국가다. 대가의 의견이지만 나에게 이것은 현대 국가를 진화의 끝에 두고 과거를 추론하는 결과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약 테무친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일(통일과 정복)을 해내고 말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 과연 그런가? 종종 유목민들이 국가를 이룬 후 군장 사회로 돌아가고, 군장 사회도 충분히 오랫동안 존재해오지 않았나.

대가는 태생적인 ‘결핍’을 안은 ‘유목국가’는 정복을 통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핍은 오히려 상비군과 행정체계와 이데올로기를 부양하는 국가의 수준에서만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내가 100년 전 1천명 유목집단의 씨족장이었다고 하자. 페르가나에서 이곳 파미르까지 이동로만 보장된다면 내 생전에 외부를 침략하지 않고도 내 씨족민에게 절대적인 결핍을 겪지 않게 할 자신이 있다. 이곳에는 여름 야생 파와 부추는 흔해서 소도 먹지 않는다. 페르가나에는 겨울 건초가 풍부하고 보리 그루터기를 먹고 가축이 똥을 싸주면 농민들이 싫어할 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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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를 타고 하영지로 떠나는 키르기스 초원의 유목인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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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에서 누군가 우리 씨족의 이동로를 보장해줄 리가 없다. 특히 외부에서 생긴 국가가 이동로를 가로막는다면 씨족장은 국가 내부로 들어가 협상할 것인가, 상대에 준하는 동맹을 형성해 대항할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내부로 들어가든 싸우든 그 결과는 보장할 수 없고, 선택은 강요된 것이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와칸 회랑에 한 키르기스 부족이 국경에 의해 절대 궁핍의 감옥에 갇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전쟁이 거의 없는 오지로 들어갔지만 그 땅이 오늘날 전쟁터가 되어버릴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땅으로 들어갈 때 그곳이 전쟁터였던 것은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선택이 유사한 고난을 불러왔지만 만약 그런 선택들을 진화의 법칙을 무시한 무지한 짓이라고 치부한다면, 지금껏 국가 밖에 존재했던 수많은 움직이는 집단들은 역사에서 지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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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으로 가는 길섶에 민들레가 커다란 꽃을 피웠다. 민들레는 말과 양 등 동물들이 좋아한다. 공원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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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아니라면 역사학에서 암묵적인 진화론과 국가 개념을 벗어나면 대개 길을 잃는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새로운 길을 가려 결심하다가도 길을 잃고 헤매다 말라 죽는 양의 최후가 자꾸 떠오른다. 하지만 진화론과 국가 개념의 감옥에서 사육되는 것보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말라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삶은 풍부하고 개념은 언제나 진부하니까. 가까운 회에 지금껏 우리가 유목국가라고 불렀던 것 전체를 처음부터 재검토하려 한다.

▶ 공원국 작가/탐험가/역사·인류학 연구자. 동양사(학사), 중국경제(석사)를 공부했고 지금은 유목인류학(박사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2018년 현재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목축 지대에서 생활하며 현장조사를 수행 중이다. <춘추전국이야기(1~11)>,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중국의 서진>, <말, 바퀴, 언어> 등을 옮겼다. 짐승에 기대어 옮겨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격조의 삶을 모색하는 글을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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