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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이굴기의 꽃산 꽃글]바위종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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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세속도시를 떠나 강원도 영월행이다. 이번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산작약을 보러 간다. 사전정보를 조금 가지고 출발했건만 현장 사정은 여의치가 아니했다. 헤매고 헤매다가 겨우 발견했는데, 이럴 수가, 어떤 자의 소행인가, 꽃봉오리를 댕강 잘라놓지 않았겠는가. 씁쓸한 기분으로 한반도지형과 선돌 등을 대강 둘러보고 태백으로 건너왔다. 여러 해 쌓인 낙엽들이 뱉어낸 먼지로 매캐해진 목구멍을 청소할 겸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는데 속보가 떴다.

그중에서도 ‘연합뉴스’의 자막들이 좋았다. 단풍잎처럼 붉은 바탕의 단문들을 이어 붙이면 드라마틱한 한 편의 시가 될 것도 같았다. ‘세 번의 포옹과 세 번 이상의 악수’라 하면 괜찮은 제목일까. 퀴퀴한 여관방에서 조금 불콰한 기운에 기대 몇몇 벗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얼마 전 먹은 평양냉면을 김치국이라 여긴 탓인지 아무런 대꾸조차 없었다. 다만 한 친구가 나의 흥분을 차분하게 진압하여 주었다. 또… wait and see!

오후 3시. 그 시각은 나에게도 있다. 그것도 매일 찾아온다. 산으로 들면 으레 그러는 것처럼 햇빛이 있는 한 산중에 머물려고 한다. 굳이 맞추자는 건 아니었지만 어제의 여운이 남았는지 시계바늘이 직각을 이루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모르고 꽃을 찾아 헤매는 동안 천하가 뒤집어지는 일은 바로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는 궁리가 문득 찾아든 것이었다.

지금은 첩첩산중의 깎아지른 절벽 앞이다. 침묵이 견고하게 뭉친 바위는 산이 내심 지키려는 위엄 같기도 하다. 도무지 닿을 수 없는 바위에 바위종덩굴이 달려 있다. 바위종덩굴은 전인미답의 저 벼랑에 앉아서 스스로 귀한 꽃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으니 세상이라고 일어날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모든 신하가 겁에 질려 사람이 갈 수 없는 길이라며 몸을 뺄 때, 암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척 나타나 벼랑 끝의 꽃을 따서 수로부인에게 바치는 것처럼, 누군가는!

작년에 들렀다가 허탕을 쳤기에 더욱 흐뭇하게 본 꽃. 불과 일 년 만에 없던 곳에서의 새로운 길을 예감하면서 허공을 걸어가는 바위종덩굴을 오래 우러러보았다. 바위종덩굴. 미나리아재비과의 낙엽 덩굴성 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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