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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세상읽기]대통령이 여론을 보고서로만 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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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살아있는 생물인 이유는 정치를 주도하는 여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여론은 태어나고 자라며 활동하다 생을 마친다. 그 과정에서 여론은 다른 여론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여론의 활동은 분자구름의 활동과 유사하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간다. 여론의 밀도가 높아지면, 전혀 다른 여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때론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며 여정을 마치기도 한다. 이처럼 여론은 조금씩 모양과 내용을 달리하며 돌고 돈다. 일련의 순환이 장기적인 패턴으로 나타날 때, 여론은 민심 혹은 시대정신으로 해석된다.

경향신문

정치지도자에게 여론이란 무엇일까. 미국 민주당의 소장파였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86년 ‘민주지도자회의’를 결성하고, 당의 정책노선을 새로운 세대에 맞게 확장함으로써 변화에 성공한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도 1997년, 기회의 확대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영국 노동당의 정강정책으로 채택하면서 민심에 화답했다. 만모한 싱 전 인도 총리는 19개 정당의 연합으로 세운 연립정부의 수장으로 복잡한 정치여론 속에서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유능한 지도자는 민심의 바다에서 시대를 읽고, 여론이 당장 원하는 것을 국가전략 안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지지자를 설득하고, 때론 싸우기도 했다.

반대로 무능한 지도자는 여론의 특징을 악용하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라 손가락을 본다. 히틀러 전 독일 총통은 여론의 가치중립성을 악용했다. 독일은 1929년 대공황을 겪었다.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위기감이 고조되던 독일. 1930년 총선에서 경제 문제 해결에 단호한 의지를 표명한 나치가 승리한다. 다수의석을 확보한 히틀러는 대공황 극복과 패전국의 짐을 벗기 바라던 독일 국민의 여론을 악용하여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 후안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여론의 탈규범성에 무지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1946년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수출을 통해 무역흑자를 냈다. 다수 국민들은 축적된 부가 분배되길 원했으며,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된 페론 대통령은 무역흑자의 대부분을 그대로 분배하였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유럽 경제가 회복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여론의 가변성을 간과했다. 2003년 3월 CNN조사에서 미국인의 74%가 이라크 공격에 찬성했지만, 2006년 8월 조사에선 61%가 전쟁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정보에 의한 여론변화였다. 국민의 강력한 지지로 시작했던 전쟁에서 약 3000명의 미군전사자가 발생하면서, 이라크전쟁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인식과 분리됐다. 또 대량살상 무기를 발견하지 못한 것도 이유로 작용했다.

민심은 사회적 공의와 보편적 윤리로 압축되는 반면, 여론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로 분출된다. 성공한 시민의 힘으로 실패한 정부를 인수한 문재인 대통령. 민심과 여론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있다. 첫째, 좌담회(집단 심층면접)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참관할 것을 권한다. 여론은 대통령 얼굴을 보면 숨어버린다. 모니터룸은 좌담회 참석자와 분리되어 있고, 생생한 국민 삶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둘째, 광화문 시민토론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참여할 것을 권한다.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국정을 기획하고 평가하기 위해 토론하는 모습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는 대통령 공약이다. 마지막으로 TV를 통한 국민과의 대화다. 최근 북·미관계와 한반도평화 및 경제정책이 여론의 주요 관심사다. 외교도 국내 여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민에게 전달되는 투명한 정보는 국론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장관이 직접 나와 정부정책을 설명하고 경제상황을 제대로 알리는 자리가 필요하다. 불필요한 논쟁에서 벗어난 대통령은 정치조력자·행정집행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여론을 보고서로 접하는 것은 영화를 대본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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