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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서구 민주주의 위기…가부장적 정치 방식인 정당 넘어설 제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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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새로운 민주주의

롬다니·정해구·임채원 좌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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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촛불혁명과 2010년 재스민 혁명의 만남.’

튀니지 인권활동가 메사우드 롬다니가 24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정해구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장, 정책기획위원인 임채원 경희대 교수와 ‘촛불민주주의의 등장과 새로운 민주주의 패러다임’을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좌담회는 정치부 정제혁 차장의 사회로 2시간가량 진행됐다.

정책기획위가 이날부터 이틀간 진행하는 국제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한 롬다니는 201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중 하나인 튀니지인권연맹 부위원장을 지낸 인권활동가다.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는 2013년 튀니지노동연맹, 튀니지산업·무역·수공업연맹, 튀니지인권연맹, 튀니지변호사회 등 4개의 핵심 시민사회조직으로 결성된 기구다. 2010년 말부터 진행된 재스민 혁명 이후 튀니지의 민주주의 구축에 결정적인 공헌을 해 201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롬다니는 재스민 혁명 이후 새 헌법이 마련됐지만 실업난, 사회적 양극화,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긴축정책 등으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더 이상 서구식 민주주의 모델이 대안이 되지 못하는 상황인 만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새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해구 위원장도 한국 사회에서 정당은 과거 기득권 체제의 한 부분일 수 있다고 진단하면서 ‘사회운동이 정당을 미래로 견인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임채원 교수는 운동정치가 제도정치를 견인한 모범 사례로 촛불혁명을 꼽았다.

- 대통령 개헌안이 의결정족수 미달로 ‘투표 불성립’이 선언됐다.

정해구(이하 정) = 정권이 바뀌고 촛불혁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게 개헌이라고 생각한다. 2~3년 뒤쯤 개헌안이 재발의돼 촛불혁명의 제도화가 마무리되지 않을까.

- 튀니지의 경우 재스민 혁명 이후 개헌을 통해 혁명의 제도화가 일부 이뤄졌는데.

롬다니 = 튀니지 혁명은 수십년에 걸친 장기적 프로세스의 결과다. 체제에 저항한 이들이 투옥되거나 죽거나 고문을 당하는 과정을 거쳐 혁명이 일어났다. 1987년부터 24년간 튀니지를 통치한 벤 알리 전 대통령은 정당을 허용하지 않았고 봉기 등 저항 움직임을 강력하게 감시했다. 재스민 혁명에서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정의 등이었다. 혁명 뒤 만들어진 새 헌법에 집회·시위의 자유, 양심·사상의 자유, 양성평등, 사회·경제권, 주거권 등을 담았다.

- 재스민 혁명과 촛불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정 = 한국의 경우 혁명, 항쟁이 여러 단계를 거쳐 일어났다. 독재에 대한 저항인 4·19혁명, 정치적 민주화를 이끌어낸 1987년 6월항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반영된 최근의 촛불 등이다. 반면 튀니지는 (모든 혁명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 같다.

|임채원 경희대 교수

지배계급과 수평 관계 이뤄

촛불, 레짐 체인지로 봐야

정당정치와 운동정치 사이

절묘한 관계 보여준 본보기


임채원(이하 임) = 촛불도 내용, 양태 면에서 혁명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튀니지는 한 달간 진행됐지만 촛불은 기간이 더 길었다. 일각에선 ‘리더십 체인지’이지 ‘레짐 체인지’가 아니라고 하지만, 저는 촛불이 레짐 체인지라고 본다. 과거 혁명은 지배계급의 교체를 의미했지만 촛불은 이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으로 변화시켰다.

롬다니 = 한국 사회가 원한 것은 부패가 없는 투명한 민주주의였던 것 같다. 재스민 혁명으로 무너진 벤 알리 정권은 나라의 사업이 있으면 거기서 몇%를 사적으로 가졌다. 한국의 촛불은 이런 부패를 없애기 위한 중요한 사건이고 투명성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걸 전 세계에 알린 사건이다.

- 부패 없는 투명한 민주주의라는 롬다니의 말은 촛불에 대한 최소주의적 해석으로 보인다.

정 = 1987년 6월항쟁은 주로 정치적 민주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촛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부패 문제도 있지만 사회정의와도 관련이 있다. 양극화, 빈부갈등을 넘어 더불어 잘사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촛불에 담겨 있었다. 양극화 해소 측면이 더 강한 요구였던 것 같다.

임 = 촛불을 협소하게 이해하려는 이들은 정권교체 뒤 사회·경제적 변화가 있었냐고 한다. 그런데 촛불 이후 사회·경제적 환경의 분위기 변화가 있다. 촛불 이전에는 헬조선, 수저계급론, 정유라가 말한 ‘돈도 실력이야’ 등이 지배적이었다면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누적된 양극화 문제가 한꺼번에 해소되긴 어려운 면도 감안해야 한다.

- 튀니지도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쉽지 않은 상황인 것 같다.

|롬다니 튀니지 인권활동가

사회·경제적 변화 이끄는 데

정당, 무기력한 모습 보여줘

세계화·낡은 정치 극복 위해

전 세계 활동가 모여 논의를


롬다니 = 세계는 지금 몇 가지 큰 이슈를 마주하고 있다. 정당이 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가, 사회정의는 무엇인가, 개별 국가 단위로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튀니지에선 사회정의 개념을 둘러싼 이견이 있었다. 또 정당이 약하고 사회·경제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무능했다. 여기에다 세계은행, IMF 등 국제기구가 튀니지에 대출을 해주면서 긴축, 공공부문 축소를 명령했다. 사회·경제적 기본권을 강화한 새 헌법과 상충돼 튀니지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치인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갖지 않게 됐다. 예전에는 좌파·우파가 명확히 구분됐는데 이런 시도들이 실패했다. 이제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전에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패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유럽을 보면 이민자 증오 등에 기반해 성공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사회정의를 믿는 사람들은 새 아이디어를 가져야 한다. 사회정의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생존할 수 없다. 한국이든 튀니지든 민주주의를 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사회정의에 대한 새 개념을 마련해야 한다. 사람들의 삶이 우선이지 투자자가 우선이 아니라는 가치를 분명히 하고, 국제원조가 아니라 그 나라가 자체적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서구 민주주의가 실패했고 서구 민주주의 특징인 사회적 관용이 퇴조했다. 그 대척점에서 월가 점령 시위, 재스민 혁명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교착상태를 해소하려면 사회정의의 개념은 물론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말인데.

|정해구 정책기획위원장

문제 해결 능력 약화된 정당

과거 기득권 체제의 한 부분

사회운동 통한 정당 개혁과

새 제도 고민 ‘투트랙’ 필요


정 = 롬다니의 발언이 흥미롭다. 전 세계적으로 197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돼 양극화가 심화됐다. 그것은 기존의 정당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역으로 사회정의가 안되니 기존 정당이 동요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인데, 문재인 정부에선 사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민주주의의 방향을 사람이 사는 문제, 삶의 질 문제 등에서 찾아야 한다. 기존 정당은 이런 문제 해결 능력을 상당히 상실한 것 같다. 상황에 따라선 정당이 과거 기득권 체제의 한 부분일 수도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정치와 운동정치의 관계를 살펴보면 운동은 특정한 시기에 크게 일어날 수 있지만 제도화된 형태는 아니다. 이 때문에 운동을 통해 정당을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운동이 먼저 발전해 과거에 머물러 있는 정당을 개혁하면서 뭔가 새로운 걸 만드는, 투트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당이 미래로 가는 힘과 같이 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임 = 촛불이 정당정치와 운동정치의 절묘한 관계를 보여줬다. 정당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니 ‘이게 나라냐’며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런 시민 압력이 제도정치를 움직였다.

롬다니 = 2001년부터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되는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반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전 세계 사회운동가들의 회의가 ‘세계사회포럼’인데 이런 움직임에 주목하고 싶다. 자본주의에 문제의식을 가진 기존 노조, 좌파 정치세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어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이 필요하게 됐다. 이런 부분이 튀니지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마그레브 지역의 사회포럼에서 노조, 인권운동가 등이 함께 만나 세 나라의 공통 문제를 논의해왔다.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한 국가 차원에서 실현할 수 있나, IMF 같은 국제기구와 다국적 기업에 어떻게 대응할까 등이다. 좌파든 우파든 기존 정치인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이 만나 어떻게 세계화를 극복할지, 가부장적 정치 방식인 정당을 넘어서는 새 제도를 어떻게 만들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

- 한국에선 촛불 이후 미투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정 = 국내적으로 볼 때 한국에서 정치적 민주화 운동과 촛불이 있었지만 일종의 문화혁명은 없었던 것 같다. 촛불 이후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그간 누적된 여성 불평등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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