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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레이더P] [랭킹쇼] 정치인의 불출마·은퇴선언·칩거…그리고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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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인 우상호 의원은 2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원순 시장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시장 경선에 나와야 한다"며 "서울시장은 1000만 서울시민을 책임지는 자리인데 4년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면 그 피해는 당과 서울시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경선 후보인 박영선 의원도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3선 서울시장의 출현은 오히려 문재인정부의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박 시장 측은 이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있다. '대권 불출마 선언'은 여러 정치적인 상황에서 표출된다. 배수진을 치는 의미로 불출마 선언이 있는가 하면, 이번 서울시장 선거와 같이 시장직에 대한 진정성을 시험하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불출마 혹은 정계 은퇴 선언은 번복되곤 했다. 그리고 대개는 지지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이 이유로 내세워졌다.

1. 이승만, 3선 불출마 선언…미국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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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 집무광경[사진=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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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은 2차 개헌을 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대통령 중임제를 폐지하는 것이 골자였다. 제헌 헌법에서는 대통령 임기는 4년, 1차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도록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한 상태여서 이 개헌안은 3선 연임을 위한 개헌이었다.

그러나 1956년 5월 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갑자기 불출마를 선언했다. 앞선 3월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유로 세 가지를 꼽았다. 고령인 점, 민주주의 국가에서 3연임이 없었던 점, 그리고 재임 당시 통일 대업을 이루지 못한 점을 꼽았다. 뜬금없는 대선 불출마 선언에 정국은 혼란스러워졌고, 급기야 전국에서는 3선 출마를 촉구하는 관제 데모가 일어났으며 결국 대선 불출마를 번복하고 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갑작스런 대선 불출마 배경에는 미국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수만 명의 미군이 한국 땅에서 목숨을 잃었고, 미국이 재선을 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3선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려고 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대선 불출마로 선수를 쳤다는 분석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미 국무장관인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한국을 떠나자 일주일도 안 돼 열화와 같은 민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번복했다.

2. DJ, 대선 불출마·정계 은퇴 선언

1992년 12월, 14대 대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저는 오늘로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 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로부터 2년7개월 뒤인 1995년 7월, 김 전 대통령은 정계 복귀를 선언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제1야당 총재에 취임했고 2년 뒤 15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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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자기자회견[사진=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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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986년 11월 김 전 대통령은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고, 이듬해 4월 기자회견에서도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 선언으로 이미 내 제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약속에 내가 묶여 있어야 하느냐는 논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당시 관훈클럽 초청 토론에서도 "불출마 선언은 내가 전두환 씨가 직선제를 수락하고 그 당시 건국대 학생들을 용공으로 몰아서 탄압한 것을 중지하면 내가 안 나갈 수 있다 했는데 상대방이 즉각적으로 거절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번복이 아닌, 조건부 불출마였음을 거듭 밝혔다.

3. 이회창, 두 번 패배 뒤 정계 은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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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열린 "이회창 회고록" 출간기념회에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회고록에 담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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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 전 총재는 "이제 저는 정치를 떠나고자 합니다. 6년 전 정치에 들어온 당시의 꿈을 이루지 못한 회한이 어찌 없겠습니까만,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 패배의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이제부터 동지 여러분은 뭉쳐서 희망의 새 길을 찾아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발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다. 이 전 총재는1997년 대선에 출마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한 뒤 와신상담했으나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연이어 패했다.

이 전 총재는 2007년 대선을 1년 앞둔 2006년 12월 경희대에서 "상유십이 순신 불사. 아직도 배 12척이 남아 있고 이순신이 죽지 않았다. 순신불사 이 어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 전율이 인다"며 정계 복귀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정계 복귀설과 대권 출마설이 끊임없이 나왔고 대선을 한 달여 앞둔 2007년 11월 7일 이 전 총재는 "저는 오늘 그동안 몸담았던 한나라당을 떠나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자 한다"면서 "우리는 이번에 반드시 정권 교체를 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좌파정권을 바꿔야 한다"며 대권 도전을 공식화했다.

이 전 총재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335만표를 얻어 3위에 머물렀다. 대권 삼수의 결말도 패배였다.

4. 손학규, 칩거와 복귀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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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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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정동영 후보에게 밀려 2등을 했다. 이듬해 민주통합당 대표로 18대 총선을 이끌었지만 299석 가운데 81석에 그치며 대패한 뒤 대표직에서 물러나 강원도 춘천에 칩거했다. 2년 뒤 정계에 복귀했고 2014년 7월 재·보궐선거에서 경기도 수원병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 토굴로 들어가 칩거했다. 그리고 2016년 7월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다시 정치권에 들어왔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정치인들의 거취 번복에 대해 "한국 정치 상황이 급박하게 변동하고 있다"며 "은퇴 등 몇 년 전 약속한 것과 전혀 다른 정치적인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김수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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