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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끌라라의 라틴인사이트]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하루를 길게 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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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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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와 저녁의 경계는 어디인가? 어쩌면 ‘저녁’식사의 시작이 오후의 끝을 알리는 것은 아닐까? 인사말로 상대의 끼니를 챙길 만큼 밥 챙겨 먹는 것을 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비로소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스페인어는 영어와 같이 오전, 오후, 저녁의 인사를 구분하는데, 스페인어의 ‘오후’는 영어의 ‘오후’보다 조금 더 길다. 개인의 생활 패턴이나 절기 별 해의 길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지만 보통 저녁 8시까지 “Buenas tardes ‘부에나스 따르데스’” (영:Good afternoon) 하고 인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이것은 오후를 길게 쓰고 저녁 식사를 늦게 하는 그들의 생활 패턴과 관련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속칭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업무시간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출근 시간은 9시 이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한 8시간 근무 후 퇴근, 18시를 전후하여 노동 일과가 종료된다. (관건은 야근이지만 중남미에는 야근 문화가 없다.) 그러나 회사를 나서는 순간부터 그들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일과를 마친다.

업무를 끝내고 회사를 나선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할지는 일단 저녁을 먹으며 생각하기로 한다. 한국인에게 밥은 하루의 화룡점정이다. 맛있는 저녁을 먹기 위해 가급적 간식도 피한다. 저녁 약속시간은 7시 전후, 식사를 마치면 대략 8시가 된다. 그 후 의식처럼 들르는 커피숍에서의 커피 한 잔이 다음 일정을 위한 쉼표가, 때로는 하루 일과의 마침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커피 대신 맥주 한 잔을 하러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모두 ‘저녁 식사를 마친 후’의 코스라는 거다. 이 시간 당신은 하루를 잘 마쳤다는 안도감과 하루가 이렇게 가버렸다는 허탈함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저녁 식사 시간 이후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우리나라의 커피숍과는 다르게 라틴아메리카의 커피숍들은 보통 저녁 8시를 전후로 문을 닫는다. 퇴근 후 간단히 허기를 채우기 위해 들른 회사원들로 붐비던 가게가 그 시간쯤이 되면 한산해진다. 사람들의 발길이 그제서야 저녁 식사를 위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퇴근 후의 커피 한 잔은 ‘직장인’에서 ‘개인’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정비의 시간일지 모른다. 잠시 쉬며 천천히 또 다른 하루의 2막 ‘저녁’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과거 유럽 귀족의 ‘애프터눈 티’ 문화의 현대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즉 식당들은 보통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영업을 시작하고 9시-10시가 되면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리고 술과 요리, 디저트까지 빼놓지 않고 만찬을 즐기는 그들의 푸짐하고 느린 저녁 식사는 우리나라 기준의 야식 타임까지 이어진다. 무엇보다 “Sobremesa ‘소브레메사’”라 불리는 ‘식탁 위의 수다’는 그들의 저녁 시간을 길게 늘이는 고유한 문화이다.

“커피를 언제 마실 것인가?” 저녁을 사이에 둔 이 간단한 문제의 결정은 이렇듯 우리 일과를 좌지우지한다. 심리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퇴근 후의 커피 한 잔에 하루를 조금 더 길거나 짧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보다 오전 내내 일체 되었던 회사와 나를 분리하는 여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묻는다면? 아마 만장일치로 답할 것이다. 바로 “Tranquila ‘뜨랑낄라’”. (여유를 가지라는 뜻) 세계 제일의 게으른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쩌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욱 길게 하루를 산다. 다만 하루를 그들만의 여유로운 방식으로 채울 뿐이다. 그 여유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라틴아메리카 사회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국선아(끌라라) 중남미 지역학 박사과정/스페인어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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