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7 (금)

[최재봉의 문학으로] ‘화산도’ 완독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대하소설 <화산도>를 손에 잡은 것은 지난해 9월. 신설된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의 1회 수상자로 이 소설의 작가 김석범이 선정된 것이 계기였다. 물론 <화산도> 전 12권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2015년 10월에 나는 이 중요한 사건을 북섹션 커버로 다루었고, 기사를 쓰기 위해 <화산도> 일부를 발췌해서 읽은 터였다. 그러나 형편상 12권 전부를 꼼꼼히 읽고 기사를 쓸 여유는 없었고, <화산도> 완독은 나중의 과제로 미뤄둬야 했다.

반년 남짓에 걸쳐 주말과 휴일 그리고 평일 저녁 시간을 할애해 <화산도> 전 12권을 독파한 소감은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뿌듯함이다. 알다시피 한국에서도 주로 지난 1980, 90년대에 적잖은 역사대하소설이 생산되었다. 그 작품들에 견주어 <화산도>의 가장 큰 차이는 이 소설이 사건의 진행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주조해내는 데 주력한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총 12권, 번역판 원고로 2만2천여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실제로 다루는 기간은 4·3 발발 직전인 1948년 2월 말부터 무장대가 사실상 궤멸된 이듬해 6월까지 15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소설은 무장봉기와 학살 등 4·3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외곽을 맴돌며 사태의 원인을 분석하고 경과를 추적하며 그 파장을 곱씹는 쪽에 가깝다.

<화산도>의 이런 특징은 주인공 이방근의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방근은 일제 말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나면서 전향 의사를 밝힌 이력이 있다. 부잣집 아들인 그는 그 뒤로는 허무주의자이자 방관자를 자처하며 서재의 소파에 파묻혀서는 고래처럼 술을 들이켜고 아무렇게나 성욕을 해소하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는 중이다.

4·3은 그런 이방근을 현실의 한가운데로 끌어낸다. “현장에 마주 서자, 서재의 소파 위에서 만들어진 감각으로는 다룰 수 없는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기묘한 세계로”(4권)라며 현실에 투신할 것을 다짐한 그는 무장대에 대한 심정적 동조와 금전적 지원은 물론, 당을 배신한 동창 유달현과 친척 형인 경찰 간부 정세용에 대한 인민재판에 가담하고 정세용은 직접 총살하기까지 한다. 그러고는 “인간은 다른 사람을 살해하기 전에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5권)는 특유의 ‘살인-자살’ 철학에 따라 결국 자살을 택한다.

“예전의 친일분자는 지금 반공, 그리고 애국분자로 변했어. (…) 4·3 진압도 친일파들의 반공 애국의 표본이 되는 거라구”(9권)라든가 “반민특위의 승리는 제주도의 승리가 된다”(12권)는 대목에서 보듯 김석범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 반대해 들고일어난 4·3 봉기와 친일파 문제가 한 몸인 듯 뗄 수 없는 관계라 파악한다. 이광수를 필두로 한 친일 문인에 대한 비판도 신랄하다. 그렇지만 주인공 이방근과 작가는 무장대의 이념적 형제라 할 북 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전적으로 ‘북’을 지지할 수 없는,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고무용(思考無用)의 독재”(9권)라는 대목에서 그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화산도> 마지막 12권 중반부에는 북제주 조천에서 벌어진 토벌대의 주민 학살 사건이 등장한다.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의 중편 <순이 삼촌>의 소재가 된 바로 그 사건이다.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대하소설과 제주 작가 현기영의 중편이 이렇게 만난다. 올해는 4·3 사건 70주년이 되는 해여서 제주 안팎에서 여러 행사가 펼쳐진다. <화산도> 12권 완독에 도전하는 것으로 ‘나만의 4·3 70주년’을 기념해보는 것은 어떨까.

bong@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사람과 동물을 잇다 : 애니멀피플] [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