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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육아휴직 후 딸 좋아하는 색깔·물건 발견… 내가 처음 느껴보는 호기심과 기쁨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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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행복입니다]

- 한민규씨의 '아빠 휴직' 경험기

늦잠의 꿈, 육아 첫날부터 산산조각… '독박육아' 아내의 고생 저절로 이해

무릎 꿇고 눈 바라보자 친구 됐죠

복직 첫날 "아빠, 출근하지 마"에 뭉클

2016년 7월 20일. '아빠 육아휴직'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이다. 선배 직원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부서를 돌며 작별인사를 했다. "부럽다" "나도 휴직하면 아기 잘 볼 수 있는데" "푹 쉬다 와"… 달갑지 않은 인사말을 뒤로하고 퇴근길 버스에 올라탔다. '내일부터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돼. 아침엔 늦잠 자야지'라는 소박한 단꿈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단꿈은 그날 바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평소 나는 늘 딸과 따로 자고 출근을 했는데, 딸과 함께 보낸 첫날 밤은 아주 가혹했다. 폭염이 기승이었던 여름, 21개월 된 아이는 수시로 잠에서 깼다. "물! 물!" 하며 물을 가져오라 하고, 에어컨 예약이 꺼지면 바로 덥다고 울어댔다. 밤새 에어컨 온도를 조정하고, 물 배달을 하다 보니 해가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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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육아휴직 경험자’한민규씨의 딸 이현양이 남동생 이준군을 안고 있는 아빠 볼을 만지며 장난치고 있다. 한씨는“1년간의 휴직을 통해 아이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비로소 삶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민규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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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아내를 마중하며 멍한 머리로 "당장 아이가 일어나면 뭘 먹이고 입히지? 그리고…" 하며 되뇌는 사이 현관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다. 울면서 일어난 딸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토닥이고 달래도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힘들게 아침밥을 차렸지만 손도 대지 않고 우유 한 잔만 겨우 먹은 딸에게 서운함을 느낄 새 없이 어린이집으로 급하게 향했다.

아이를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집안일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밀린 설거지, 수북이 쌓여 있는 빨랫감, 널린 장난감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오후 3시가 됐다. '제대로 한 것 하나 없는데….' 두통이 몰려오면서, 아내가 언제 올지 시계만 바라봤다. 퇴근하는 아내 발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전날 푹 자보겠다던 허황한 단꿈에 실소가 나왔다. 1년 넘게 '독박육아'를 했던 아내의 노고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육아휴직 초반, 어린이집을 다녀온 아이와 주로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딸이 좋아하는 물건, 색깔, 음식이나 습관의 발견은 내가 처음 느껴보는 호기심과 기쁨이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꼬리잡기 놀이, 공 주고받기, 풍선 불어 던지기 놀이 등 땀을 내며 자주 놀다 보니 아이와는 어느새 편한 친구가 됐다. 철저히 어른으로의 나를 버리고 아이의 시선, 처지에서 생각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대화할 때도 항상 무릎을 꿇고 아이 눈을 마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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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옷을 맞춰 입은 한민규(왼쪽), 전호연(오른쪽)씨 부부가 아들 이준군과 딸 이현양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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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를 하면서 무한한 행복감에 부성애도 커졌지만, 육아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회사 일처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 내가 계획한 대로 아이는 따라주지 않았고, 아이 욕구에 나의 시계를 맞추다 보니 어느덧 반복적인 일상 속에 무력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양육자는 감정노동자였고, 특히 아빠 육아는 더욱 고립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얼마 전 나는 복직했다. 잠시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1년이 훌쩍 흘러간 것이다. "아빠! 출근하지 마. 이현이랑 놀아야지!" 딸의 인사말을 떠올리며 출근하는 통근버스 안에서 복잡미묘한 감정이 온몸을 감쌌다. 복직 후 야근을 자주 하며 회사에 빠르게 적응해가는 동안 아이들과는 갑자기 멀어진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휴직 기간 아이와 쌓은 애착을 바탕으로 서로를 믿으며 변함없이 행복한 육아를 이어가고 있다.

3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인생에서 지난 1년은 천천히 걸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빠 휴직을 통해 비로소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었고 삶의 이유를 확인하게 돼 감사할 뿐이다. 휴직 첫날의 소박한 단꿈은 아직 간직하고 있다. 두 아이의 아빠로서 나도 아이들과 함께 계속 성장하고 있다.

[한민규 육아휴직 경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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