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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공감]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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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범죄교정 분야의 사회복지사 제롬 밀러가 재소자들과의 오랜 상담에서 발견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는 상당수의 재소자들에게 가장 두터운 심리방어기제는 회피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회피했고 범죄로 짊어져야 할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교도소 내에서 마치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처럼 행동하기 일쑤였고 교도소에서의 식사가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노래 부르곤 하였다. 자신이 준 피해와 고통에 대해 통렬히 반성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부의 사람들을 보면서 제롬 밀러는 ‘회피’야말로 사악함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들이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회피가 아니라 원래 직면이다. 그들이 직면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제롬 밀러는 고통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타인에게 준 고통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둔감하지만 자신의 고통에는 첨단 센서보다 더 민감했다. 어떤 살해범은 타인의 가족을 처참히 짓밟은 행위에 대한 참회는 없었지만, 자신의 가족이 당한 고통에는 마치 맨살에 불을 대듯이 아파했다. 밀러는 자신에 대한 처절한 고통 없이는 도덕성을 회복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했다.

경향신문

또 정신과 의사 아론 벡은 이 회피하는 사람들의 인격핵심에는 철저한 자기중심성이 작동한다고 했다.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말라’ ‘모든 것을 나에게 맞추라’는 식의 과대적 발언은 평범한 우리들의 언어가 아니다. 만일 이런 말을 듣고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면 보통 광신도이고, 억지로 강요받는다면 착취이자 고문을 받는 상태일 것이다. 임상적으로 이런 유형의 말을 하는 환자들은 병적인 자기애 성격장애 환자들이거나 조증 상태의 환자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구세주님이거나. 이런 발화의 심리적 진실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유아적이고 허망한 자기중심성이다.

또 많은 범죄자나 정치인들이 타인의 자아를 침탈하는 이유는 그들의 왜곡과 착각으로 점철된 우월성 때문이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갈린스키 교수는 권력을 갖게 되거나, 상대방보다 높은 권력적 지위에 있게 되면 평상시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했고, 버클리대학의 켈트너 교수는 권력을 분별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공감과 관련된 거울 뉴런 작동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또한 정신분석가 모니카 루치는 권력에 기초해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인간분류법 때문이라고 했다. 권력적 가해자, 고문자들은 인간을 두 부류, 즉 인간과 인간 이하(subhuman)로 분류했고, 자신은 항상 인간이며 주변의 사람들은 인간일 때도 있고, 인간 이하일 때도 있는데, 놀랍게도 그 판단의 기준은 바로 자신의 그날 기분일 때가 많다고 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일은 인간사에 정말 중요한 일이다. 파커 파머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격의 크기가 그 사람의 크기라고도 했다. 아무 고통도 받아들일 수 없거나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의 인격은 사실 자라지 않은 야만의 인격이다. 어찌 보면 그 야만성에 사람들이 미혹되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희귀한 힘이니까.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오고 있는 전환적 시기의 도상에서 여러 시민들의 삶에는 필히 고통이 뒤따른다. 고통을 주어왔던 사람들은 참회와 후회의 고통 앞에서 마땅히 과오를 받아들이고 과거에 이미 파괴된 자신을 무참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속죄를 기다려야 한다. 속죄는 자신이 지불하고 결제하는 시장체계가 아니라 피해자의 회복에 달려있는 인본체계임을 깨우쳐야 한다. 고통을 받아왔던 사람들은 애도와 위로, 연대와 지지를 통해 과거의 상처받은 자신을 치유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치유해도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어려움이 있으므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회복은 현재의 변화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던 만큼 현재가 철저하게 혁신되어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기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안심은 그나마 꽤 좋은 약에 해당된다. 이 과정에 문재인 대통령과 그 팀이 위니캇이 말한 충분하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제롬 밀러의 말처럼 우리는 이 고통을 통해 더 성숙된 도덕을 가진 국민이 되길 바란다.

<김현수 |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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