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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미투 51일, 남성 피해자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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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에게 성추행 당해...남성發 미투도 등장
“성폭력은 성별이 아니라 권력관계에 의한 것”
“남자XX가 얼마나 못났으면…” 피해자 조롱하기도
전문가들 “관습적 性인식 개선되어야”

“2013년 근로장학생 시절 회식이 끝난 후 (같이 일을 했던) ‘형’에게 성추행을 당해 밤새도록 울면서 내 몸을 씻었습니다. 미투 운동 덕분에 저 같은 남성 피해자도 사회에 목소리를 낼 기회가 생겼습니다다. 다른 사람의 몸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걸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지난 17일 서울대 익명게시판(대나무숲)에 올라온 남성 미투의 일부다.

이보다 앞선 10일 경북대 익명게시판에도 남성 미투가 올라왔다. 글쓴이는 “저는 95년생, 올해로 24살이 되는 남성입니다. 고교 시절 1년 동안 가해자 4명에게 지속적인 성적 학대를 당했습니다. 7년전 그 교실에서, 아니 학교에서 저는 '남창'이라고 불렸습니다. 젠더(성)폭력은 권력의 문제입니다”라고 적었다.

조선일보

그간 성폭력 사각지대로 여겨진 남성 성폭력 피해자도 미투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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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9일 서지현 검사로부터 촉발된 한국판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 50여일만에 성폭력 피해 남성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학 익명게시판을 중심으로 올라온 남성발(發) 미투는”성폭력은 성별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폭력은 서열에 의해서 가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설명이다.

◇성폭력은 성(性) 문제 아닌 권력 문제
“이 글은 유서다. 나는 지난 1년이 넘는 동안 수 차례에 걸쳐 성추행 당했다. 그는 나의 연구실 선배였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해 교수님께 말씀 드렸고 사건은 학교 성평등센터와 경찰을 거쳐 검찰까지 진행되었다. ‘조건부 기소유예’라는 피해자 입장에서 시원치 못한 통보를 받았지만 그가 반성만 한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피해를 알고 계시는 교수님이 이제 그를(가해자) 연구실로 데려오려고 하신다는 것을 들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선생님 제자도, OO대 학생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나를 버렸고, 나는 그 세상을 떠나고 싶다.”

3년전 서울의 한 대학에서 동성(同性)성추행을 당한 대학원생 A씨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남긴 글이다. ‘유서’라고 밝힌 A씨 글에는 남성이 같은 남성에게 성추행 당했을 때의 수치심과 주변의 미온적인 반응이 고스란히 담겼다. 극단적인 마음을 먹었던 그는 주변에 의해 구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남성 미투에는 “성범죄에서 남자는 대부분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고 생각해 왔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미투 운동이 마치 성 갈등을 부추기는 듯 오해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바가 있으면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미투 운동은 남성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로 확산되고 있다”며 “이는 기본적으로 (성폭력이) 권력 관계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1066건이던 남성 성폭력 피해자 숫자가 이듬해(2015년)에는 1243건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2016년은 이보다 다소 떨어진 1212건이다. 특히 유사강간 피해를 입은 남성 비율은 2014년에 15.2%, 2015년에 16.2%, 2016년에 16.9%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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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페이스북 경북대학교 대나무숲에는 남성 미투 글이 올라왔다./경북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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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XX가 얼마나 못났으면…” 피해자 조롱 하기도
‘성폭력 사각지대’로 여겨지는 남성 성폭력은 전체 성폭력 중 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남성 성폭력 피해자도 자살 충동, 우울증, 수치심 등을 겪는다. 그러나 피해자에 대한 조롱성 반응도 여전하다.

“남자XX가 얼마나 못났으면 그런 일을 당하느냐.” “남자가 당해봤자지.” “너도 만지면 되잖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남성 미투에는 이처럼 피해자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댓글이 달렸다. 한 직장인은 “여자가 성추행 당했다 그러면 욕을 하거나 위로를 해주는데 남자가 추행당했다고 하면 죄다 장난만 친다”며 “남자피해자가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고 썼다. 신홍섭(26)씨도 “남성이 여성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면 ‘너도 좋지 않았냐’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며 “남성 성폭력 피해자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상황에서 남성 미투가 나온 것은 정말 용기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전모(30)씨는 대학교 재학 시절 아주머니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던 사실을 주변에 알린 적이 있다. 그러자 ‘아줌마도 여자다, 남자XX가 가리면 안된다’, ‘여자 손 잡고 좋은거다’는 냉소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전씨는 “(주변 조롱을 받은) 이후에 비슷한 일을 당해도 남에게 말을 안하게 됐다”고 말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도 “남성 성폭력이 경우, 사회적 편견으로 피해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것 자체만으로 여성적인 남자 혹은 동성애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남성 미투는 “저는 이성애자”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김모(35)씨는 “여성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사실을 고발할 때 ‘저는 이성애자’라고 하느냐”면서 “이는 (남성 피해자들이) 게이로 오해받을까봐 스스로 조심스러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모(27)씨도 “‘남성 미투’는 남자가 자신을 ‘사회적 약자’라고 스스로 얘기하는 것 같아서 좀 꺼려진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 미투가 자리 잡으려면 ‘남자인데 이런 일 당하냐’는 관습적 성(性)인식이 우선 개선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다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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