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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덩샤오핑 21주기…시진핑과 '같고도 다른 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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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덩샤오핑 중국 전 주석이 1979년 1월 31일 미 워싱턴에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부부와 만났다. © AFP=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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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윤지원 기자 = 2월 19일은 중국 개혁개방 노선을 설계한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국 주석(1904~1997)의 사망 21주기다. 1만명의 희생자가 나온 톈안먼(天安門) 사태란 정치적 오점에도 그의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어 중국이 전 세계를 이끄는 2개 주요국(G2)으로 성장했다는 평가가 많다.

집권 1기 시 주석은 자신의 개혁·개방 리더십을 견고히 하기 위해 덩샤오핑 위업을 부각하며 자신을 그 적자로 홍보했다. 특히 집권 초기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행보를 그대로 따라하기도 했다.

2012년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 광둥성을 방문해 정치 개혁 메시지를 던진 이 행보는 덩샤오핑이 1991년 톈안먼 사태 이후 답보 상태에 머물던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남부를 시찰했던 것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하지만 집권 2기를 시작한 시 주석은 이제 덩 전 주석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냔 평가가 나올 정도다. 특히 19기 당대회 때 당헌에 '시진핑 사상'을 수록했는데 이는 '덩샤오핑의 이론'보다 우위에 있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현재 덩샤오핑과 시진핑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평가는 각기 다르다.

덩유엔 중국 민간 연구기관 차하르연구소 연구원은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중국의 개혁개방은 없었다"고 평했다. 덩샤오핑의 경제발전 노선인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즉,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경제 성장을 추진한 선부론이 소득불균형과 같은 여러 문제를 잉태한 것은 덩의 과오로 꼽았다.

덩유엔 연구원은 또 덩샤오핑의 뚜렷한 경제·사회 정책과 달리 19차 당대회에서 당헌에 기록된 '시진핑 사상'은 실체가 묘연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시 주석은 덩샤오핑 때와 같은 역사의 분기점에 서있다"며 이후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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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전 주석© AFP=뉴스1


시아밍(夏明) 뉴욕시립대 정치학 교수는 미국 자유의소리(VOA)와 인터뷰에서 "서구 사회는 덩샤오핑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시 주석엔 의문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덩샤오핑을 '자본주의자'라고 칭하고 덩샤오핑의 관심사는 미국식 서구 모델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문화대혁명 당시 '자본주의자이냐'라고 물은 홍위병의 질문에 덩샤오핑이 '그렇다'고 답한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반면 시 주석에 대해선 "앵글로색슨족의 민주적 모델을 점차 벗어나고 있다"면서 "봉건제로 회귀하려 한다"고 평했다.

'반(反)마오 주자파'란 비판을 받고 1966년 실각한 뒤 1980년대 다시 중국 최고 지도자에 오른 '오뚝이' 덩샤오핑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 한가지 교훈을 얻었다.

시아밍 교수는 "덩샤오핑은 공산당이 극단주의와 독단에 빠지면 실패하고 팩트에 근거해 진실을 찾아가려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취할 때 공산당이 번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불행히도 시 주석은 극단주의와 독단에 빠져있다"고 대조했다.

그러면서 "덩샤오핑은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사회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지켜보는 고양이와 같다면 시진핑 주석은 사회에 크게 개입하고 주변인들에 높은 충성심을 요구하는 개와 같다"며 "두 지도자는 중국과 역사에 각기 다른 유산을 남길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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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주석(왼쪽)과 마오쩌둥 전 주석의 초상화가 중국 베이징 시장 벽면에 걸려있다. (© AFP=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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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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