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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하)그래도 버텨보면…‘희망’ 있겠지, 그렇게 버텨봐야…‘희망고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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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청년구직자 심정

경향신문

1997년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자리 잡은 ‘청년 실업’이라는 긴 터널의 출발점이다. 기업들이 갑자기 있던 사람들도 내보내는 판에 신입직원들을 뽑을 리 없었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기업을 골라 갔던 시절에서 수십장의 지원서를 내야 하는 현실로 뒤바뀌었다. 외환위기 발생 20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7년 청년들은 수십장의 지원서가 수백장으로 늘었고 평생직장을 꿈꿀 수 있는 공무원과 공기업 입사시험에만 몰두하고 있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에 이어 내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 세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 세대’까지 암울한 현실을 빗댄 신조어는 갈수록 늘어만 간다. 이대로 가면 N가지를 포기한 ‘N포 세대’는 어디까지 확장될지 모른다

▶IMF 세대 졸업자 이야기

성균관대 91학번인 이모씨(45)는 1997~1998년을 ‘세상이 뒤집힌 해’로 기억한다. 그는 1998년 2월 대학을 졸업했다.

“우리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대졸자들은 기업에서 모셔간다는 말을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특별히 학점 관리를 하지도 않았고 최저 요건만 충족하면 대부분 취업이 됐다. 토익과 같은 스펙도 없는 시절이었다. 바로 위 학번인 90학번 선배들은 진짜 과대표가 던져주는 추천서 가지고 입사한다고 했을 정도로 골라서 갔다. 1996년 말까지 그랬다.”

불과 1년도 안되는 사이에 이런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후 추천서가 사라졌다. 공채로 뽑는 곳도 거의 없었다. 합격해서도 문제였다. 이씨의 친구들 중에는 외환위기 이전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이후 ‘입사 대기’ 상태가 된 사례도 있었다.

당시 현대전자, SK건설, 동양시멘트 등 유수의 기업들이 채용을 취소했다. 채용 확정 통보를 하고서 수개월 뒤에 입사 취소 결정을 한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7년 말 현대전자에 입사하기로 내정됐다가 외환위기로 1999년 6월 입사가 최종 취소된 김모씨 등 11명은 현대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결국 졌다. 대법원까지 간 이 소송에서 재판부는 ‘IMF (구제금융) 사태에 따른 경영악화 등을 이유로 입사를 취소한 것은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갖췄다’며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다만 입사 예정일부터 해고 통보일까지의 임금은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흔히 말하는 ‘청년절벽’이 시작된 것 같다. 학교 도서관을 가면 취업준비생으로서 도서관에 나오는 졸업생들이 많아졌고 예정에 없던 대학원을 가는 친구들도 생겨났다”고 했다.

이씨도 ‘취준생’이 됐다. 졸업 이후 학교 도서관에서 언론사 입사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1년을 기다려도 언론사들은 사람을 거의 뽑지 않았다. 공채 공고가 나야 원서라도 넣어볼 텐데 공고가 뜨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이씨는 기업에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10곳 정도 넣었으나 넣는 족족 떨어졌다. 토익 준비도 같이 시작했다. 집안이 괜찮은 친구들 중에는 어학연수를 가는 친구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일종의 도피 겸 스펙쌓기였다.

1990년대 청년실업률은 4~5%대였다. 그러나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서 11월부터 슬금슬금 6%대로 올라가더니 1998년 2월 11.3%까지 치솟았다. 1997년 한 해 동안 평균 청년실업률이 5.7%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갑자기 2배 이상 실업률이 높아진 것이다.

졸업 후 1년2개월이 지난 1999년 4월 이씨는 국내 대기업의 정보통신 계열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정규직이 아니라 인턴사원이었다. 이씨의 기억에 ‘수시 모집’ ‘인턴 모집’이라는 용어도 그때 생겨났다. 인턴으로 6개월 다니고 정직원으로 채용돼 안도했다. 그러나 4년 만에 회사가 망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이씨는 그룹 내 다른 계열사로 옮겨갔다.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취업난을 마주하고 극복해야 하는 세대였던 이씨는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세대보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떠올렸다.

“당시 기업들은 면접 보면 2만~3만원의 면접비를 줬다. 면접비 받으려고 원서 쓴 적도 있었던 걸 보면 지금 N포 세대만큼의 절박함을 갖고 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지금의 위기만 잘 버티면 다시 좋아질 거란 희망이 있었는데….”

물론 외환위기에서 10년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회사가 다시 한번 휘청거렸지만 지금 이씨는 두 아이 아빠이자 국내 대기업에서 부장 직함을 달고 있다.

▶IMF 세대 신조어들

■ 취업재수생

외환위기 이후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되지 않는 세대. 취업 대신 대학원을 택하는 사람도 생기면서 이때 대학원 입시전문학원이 처음 등장

■ 노가리퇴

명태보다 작은 노가리에 명예퇴직의 ‘퇴’자를 붙인 조어. 입사시험에 갓 합격한 대졸 취업자들이 입사도 하기 전에 정리해고를 당하는 것을 일컫는 말

■ 대기족

노가리퇴와 비슷한 의미. 취업은 했지만 기업들이 뽑아만 놓고 정식 출근을 무기한 연기해 집에서 전화기만 쳐다보며 대기하는 취업예정자

■ 잠수족

취업 빙하기를 견디다 못해 외부와 연락을 끊고 외출도 하지 않는 취업준비생

■ 해녀족

잠수족 중에서도 특히 여성을 지칭하는 말

■ 유(U)턴족

국내 취업난을 일시적으로 피하기 위해 해외유학을 떠났다가 환율 폭등으로 돌아온 사람

■ 백수·백조

외환위기로 인한 실업난으로 졸지에 직장을 잃은 남성·여성

■ 캥거루족

졸업을 미루거나 졸업 후에도 취업을 못한 채 부모와 함께 살며 대학가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

■ 장노

장기간 노는 사람, 오랜 취업준비에 지쳐 취업을 포기하기 시작한 구직자

■ IMF베이비

1998~1999년에 어렵게 태어난 아이


▶N포 세대 졸업자 이야기

경향신문

외환위기 발발 20년이 지난 2017년, 지금의 청년세대에게는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외환위기 시절보다 더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요즘 청춘세대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청년실업률은 연 9%대를 기록했고 올해 들어 청년실업률은 외환위기 시절과 비슷한 수준까지 치솟고 있다. 통계청은 청년들의 11월 체감실업률이 21.7%라고 발표했다.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15년 이후 가장 높다.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경영분석팀장은 “외환위기 이후로 청년들이 사회에 진입하는 문이 막혔다”면서 “기업 입장에서 ‘성장’보다는 ‘존속’에 방점을 두니 사람을 뽑아서 교육시킬 요인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 좁은 문이라도 들어가려고 취업자들 사이에서 고스펙만 많아지고 취업을 위한 졸업유예자도 늘어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세대 05학번인 박진영씨(31·가명)는 대학을 졸업한 지 4년째다. 다른 말로 하면 4년째 취업준비생이다. 시험을 위해 휴학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사실 8년째 취업준비생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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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처음엔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다 시험을 포기한 뒤 공기업 위주로 응시했다. 흔히 ‘A매치’라 불리는 금융 공기업을 비롯해 일반 공기업까지 공기업 입사시험은 거의 다 봤다. 한국거래소,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는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놀라운 건 최종면접에 같이 들어간 10명 중 8명 정도가 로스쿨 재학 중인 예비 변호사이거나 변호사, 회계사라는 사실이었다. 같은 과를 졸업한 친구들도 대기업에 취직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고 나머지는 대학원에 진학했거나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다.

공무원이 최고라는 생각은 외환위기 이후에 퍼지기 시작했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사람들 머릿속에 박히자 평생직장을 유지할 수 있는 공무원시험이나 공기업 입사 경쟁률이 치솟았고 로스쿨 졸업생처럼 전문 자격증이 있는 이들조차 앞다퉈 몰려들고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입시를 포기하거나, 대학입시와 동시에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 하여 ‘공딩족’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박씨는 “스물아홉이 되던 해 굉장한 불안과 압박감을 느꼈다”면서 “이때부터는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기업이라도 가보자는 생각에 거의 모든 기업에 원서를 다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거의 1차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일본어 자격증인 JLPT 1급,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1급, KBS 한국어능력시험 1급 자격증을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 서류전형 탈락일은 이른바 ‘광탈절’이라 불렀다. 빠르게 탈락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박씨는 국내 유명 대기업 4곳에서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지만 합격 통지를 받지 못했다. 박씨는 성별과 나이가 걸림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올해를 끝으로 국내 취업 기대를 접기로 했다. 내년부터는 ‘플랜 B’로 일본 취업을 준비해 볼 생각이다. 도쿄신문은 지난 13일 고령화로 일손이 부족해 취업이 정해진 일본 대학생 10명 중 6~7명은 최소 2곳 이상 일자리를 확보해놓고 저울질하다 직장을 선택한다고 보도했다.

“20대까지 취업 못한 걸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경쟁자에 비해 분명 모자란 것이 있었겠지. 절실함이 덜했나 보다’라고 스스로를 자책한 적이 많았어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부정청탁, 거짓 블라인드 등 이런 게 현실인 듯 싶습니다. 이걸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박씨는 불행 중 다행으로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됐다. 매일같이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학원 수업을 듣고 집과 학원만 오갔다. 딱히 취미도 없다. 박씨 생각에 취준생에게 취미란 사치일 뿐이다.

취미가 사치인 건 졸업한 지 2년이 넘은 변모씨(27)도 마찬가지다. 서울 유명 사립대 11학번인 그 역시 취직을 위해 영어 스피킹 시험, 중국어 자격증 등을 다 따놨지만 최종 합격 통보서를 받아보질 못했다.

남자친구가 있지만 변씨는 “취업준비로 마음의 여유도 없고 시간도 없어 곧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결혼 문제도 그렇다. 요새 친구들 사이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하는 말이 ‘결혼하면 거지꼴 못 면한다’이다. 변씨는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김모씨(25)는 좋은 말로 하면 ‘프리터족’이다. 2012년 수도권에 있는 전문대를 한 학기만 다니고 군대를 갔다왔다. 군 제대 후 학교에서 마주친 선배들의 모습은 우울 그 자체였다. 대학 도서관에서 공무원시험 과목 책만 몇년째 펼쳐들고 있는 선배들을 보고 있노라니 대학을 졸업하는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등록금 부담으로 힘든 부모님을 생각해 차라리 일찌감치 돈을 벌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수준의 시급제뿐이었다.

“아르바이트로 한 달 벌어봐야 몇십만원 되지 않았어요. 괜히 화가 나고 ‘이렇게 해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게 됐어요. 하지만 벌어놓은 돈 다 쓰면 또 아르바이트 구하고 그러고 있죠. 부모님은 다시 학교 가라고 하시지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미래요? 글쎄요….”

▶N포 세대 신조어들

■ 지여인

지방대학 졸업자, 여성, 인문계 학생을 줄여 부르는 말. 취업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이들을 지칭

■ 인구론

인문계 졸업생 90%가 논다는 의미

■ 열정페이

사실상 교통비와 식비 정도에 불과한 급여를 주며 취업준비생과 인턴사원을 착취하는 행태를 비꼬는 말

■ 이케아세대

높은 스펙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낮은 급여를 받으며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

■ 잉글리시푸어

기업 입사에 기본 스펙인 영어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영어 점수는 높은데 전공 성적은 좋지 않은 학생

■ 모라토리엄족·공휴족

졸업유예와 휴학을 한 상태에서 취업준비를 위한 스펙 쌓기에 몰입하는 취업준비생, 대학을 7~8년씩 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10년 넘게 대학 졸업을 유예한 채 취업준비를 하는 대학생이 증가한 것을 일컫는 말

■ 전화기

상대적으로 취업이 잘되는 전자과, 화학공학과, 기계과를 합친 말

■ 호모인턴스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인턴을 맴도는 이들

■ 공딩족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입시를 포기하거나 대학입시와 동시에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는 극단적인 세태를 반영하는 말

■ 비계인

‘비정규직, 계약직, 인턴’을 반복하며 취업준비를 하는 사람


<임지선·류인하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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