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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사우디 왕가 또 ‘피의 숙청’ … 빈살만, 알왈리드까지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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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당국 “반부패위 구성” 직후

왕자 11명, 전현직 장관 수십 명 체포

NYT “리츠칼튼 호텔에 왕족 수감설”

도주 막으려 전용기 비행장도 폐쇄

지난 6월 살만 국왕‘패밀리 쿠데타’

친아들 빈살만 왕세자로 전격 책봉

지난 6월 왕세자였던 사촌형을 축출하고 왕세자 자리를 넘겨받은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살만(32)의 권력 강화 시도가 가족 간 ‘피의 숙청’으로 이어지고 있다.

4일(현지시간) 사우디 국영 알아라비야 방송은 이날 사우디 당국이 반(反)부패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왕자 11명, 현직 장관 4명, 전직 장관 수십 명을 부패 혐의로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이 위원회의 수장은 사우디 국왕 살만 빈압둘아지즈(82)를 대신해 국정을 총괄하고 있는 빈살만 왕세자다. 그에겐 ‘미스터 에브리싱(Mr.Everything)’이란 별명이 붙어있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체포된 왕자들 중엔 ‘아랍의 워런 버핏’이라 불리는 무함마드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도 포함됐다. 빈살만의 사촌형인 알왈리드는 4일 기준 소유 자산 180억 달러(약 20조원)로 미국 경제지 포브스의 세계 부자 순위 45위를 기록 중인 아랍권 최대 부호다. 알왈리드가 소유한 투자회사 킹덤홀딩스는 애플, 디즈니, 21세기폭스, GM 등 글로벌 기업의 지분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다.

중앙일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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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살만, 국방부 장관에 측근 빈아야프


숙청은 이날 저녁 실시된 대규모 인사 교체에서도 이어졌다. 빈살만은 국가방위부 장관을 맡고 있던 미텝 빈압둘라 왕자를 경질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인 칼레드 빈아야프를 앉혔다. 미텝은 1974년 22세의 나이로 사관학교를 졸업해 임관한 이래 평생을 군에 몸 담아온 사우디 군부의 핵심 인사다. 지난 2010년 50여 년간 사우디군을 지휘해 온 아버지 압둘라 전 국왕으로부터 지휘권을 이어받고 군을 통솔해 왔다. 불과 5개월 전 왕세자로 책봉된 빈살만이 사우디 경제의 ‘큰손’과 2대에 걸쳐 쌓아 온 군 권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셈이다.

새로 설치된 반부패위원회는 국왕의 이름으로 무제한에 가까운 수사권과 여행금지·자산동결 등의 조치를 행사할 수 있어 향후 더 많은 사우디 고위 인사들이 숙청될 가능성이 예고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방한해 이낙연 총리와 만났던 아델 파키흐 경제장관도 4일 경질됐다.

NYT에 따르면 이날 수도 리야드에 있는 리츠칼튼 호텔의 영업이 중단되면서 현지에선 이 호텔을 왕족을 수감하는 감옥으로 쓰려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특히 리야드의 전용기 비행장도 폐쇄됐다. 고위급 인사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서다.

왕세자 책봉 5개월 만에 개혁 드라이브


이번 숙청은 빈살만이 추진 중인 개혁을 성공시킬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이 나온다. 빈살만은 지난 6월 왕세자로 책봉된 이래 사우디 개혁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사우디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데 이어 지난 9월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뷰에서 “사우디는 지난 30여 년간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며 극단주의를 타파하고 온건 이슬람 국가로 돌아가겠다고 강조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빈살만의 포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사우디 서부 사막지대에 서울 44배 규모인 2만6500㎢ 면적으로 조성되는 신도시 ‘네옴’ 프로젝트다. 빈살만은 지난 9월 개최된 미래투자이니셔티브 콘퍼런스에서 5000억 달러(약 560조원)를 투자해 이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빈살만은 “네옴은 석유가 아니라 바람과 태양 등 천혜자원 기반으로 조성된다”면서 “이곳은 관습적인 기업이 아니라 몽상가들을 위한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가 ‘포스트 오일’ 시대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석유는 국제 사회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도 사우디 왕가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사우디 왕가는 석유 국영화를 통해 이 자원을 독점하면서 국가 권력을 독차지해왔다. 국민을 엄격하게 감시·통제하면서 ‘오일 머니’로 무상의료·무상교육 등의 복지를 베풀어 국민의 불만을 무마해왔다. 빈살만이 ‘네옴’ 프로젝트를 선언하고 친환경 에너지를 강조한 것은 석유로 국민을 통제하는 사우디의 전통과 단절하고 폐쇄적이던 사우디의 산업을 외부에 개방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FT “일부 왕족, 개혁 전 더 많은 상의 요구”


석유 독점으로 권력 기반을 다져온 기득권층이 이를 달가워할 리가 없다. 4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빈살만의 개혁 속도와 규모는 왕족들 사이에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일부 왕족들은 개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하며 개혁에 앞서 자신들과 더 많이 상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FT, NYT 등 외신에선 빈살만이 이 같은 왕족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대대적 숙청을 개시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선 살만 국왕이 머지않아 퇴위하고 빈살만에게 왕위를 승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6월 갑작스런 빈살만의 왕세자 책봉부터 대규모 개혁 프로젝트 발표, 대대적 숙청까지의 흐름은 빈살만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는 것이다. 지난 9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복수의 왕실 측근을 인용해 살만 국왕이 퇴위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르면 올해 말에서 내년 초 사이에 왕위 계승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냉혹하고 악명 높은 빈살만에 사우디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빈살만은 경제 분야에선 온건한 개혁 성향을 보이는 반면 외교·안보 정책에선 종종 호전성을 드러냈다. 국방장관을 지냈던 지난 2015년 3월엔 군 참모들과 상의도 없이 예멘의 시아파 반군을 향해 무차별 공습을 퍼부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쫓겨난 당시 왕세자 빈나예프 가택연금


지난해 초 벌어진 사우디 정부의 국내 시아파 성직자 47명 집단 처형, 지난 6월 아랍권 국가의 카타르 단교를 주도한 것도 빈살만으로 알려져 있다. 4일 NYT는 “일부 사우디 사람들은 빈살만이 경험이 부족하며 성미가 급하고 권력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본다. 빈살만이 나이 많은 친척들을 누르고 왕가 권력을 독점한 것에 대해서도 분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빈살만의 냉혹함은 지난 6월 왕세자 책봉 당시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빈살만과 그의 아버지 살만 국왕은 당시 왕세자였던 무함마드 빈나예프를 왕궁으로 부른 뒤 감금하고 왕세자 자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밤새 이어진 협박 끝에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빈나예프는 사촌동생 빈살만 앞에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동영상을 촬영하는 굴욕을 겪었다. 빈나예프가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는 이유는 ‘약물 중독 증세’ 때문인 것으로 꾸며졌다. 이후 빈나예프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수도에서 1000㎞ 떨어진 제다에서 가택연금 중이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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