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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전우용의 우리시대]축제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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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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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계절이다. 요즘 서울 거리를 걷노라면 여기저기 담벼락이나 가로수 사이에 축제를 홍보하는 현수막들이 걸려 있는 걸 보게 된다. 거리축제, 골목축제, 상가축제, 문화축제 등 명칭도 각양이고, 서울시, 자치구, 동 주민자치센터, 상가 번영회, 시민단체 등 주최도 각색이다. 서울만 이런 것이 아니다. 각 시·도·군 단위로 개최되는 온갖 명목의 축제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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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붉은대게축제, 충주 농산물한마당축제, 횡성 한우축제, 서산 뻘낙지먹물축제, 양양 연어축제, 문경 쇼핑관광축제, 전주 비빔밥축제, 음성 인삼축제, 부산 자갈치축제, 의정부 부대찌개축제…. 진행 중인 축제들을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하다가 너무 많아 그만두었다. 10월의 한국은, 아니 언제든지 한국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축제가 많은 나라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축제를 즐기게 된 것일까?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게 풍속이었다던 삼한시대부터?

1994년 10월, 성수대교가 갑작스럽게 무너져 30여명이 사망했다. 이 참사로 인해 그 며칠 후로 예정됐던 서울 정도 600년 기념 축제 프로그램이 대부분 취소됐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단발성 대규모 축제는 무산됐지만 짧게는 600년, 길게는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연례 축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세계의 역사도시들에는 대개 유서 깊은 대표 축제들이 있는데, 서울에도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당시 국외자로서 극히 일부의 일에만 관여했기 때문에 논의 과정 전체는 알지 못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주로 결혼식 이벤트 기획을 통해 갓 자리를 잡은 전문 업체들의 시장 확대 욕구와 결부돼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1998년인지 99년인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서울시에서 ‘서울 대표 축제’ 기획안을 공모했는데, 1등 당선작의 제목은 ‘물 불 바람 축제’였다. 이런 종류의 기획안이 으레 그렇듯이 맨 앞에는 서울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아우른다는 그럴듯한 취지문을 붙였으나, 내용인즉 한강에서 불꽃놀이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연구소는 이 기획안에 ‘역사성’을 담을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한강 불꽃놀이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로부터 1~2년 뒤, 서울시 대신 화약 생산 기업인 한화 주최로 한강에서 ‘제1회 세계불꽃축제’가 열렸다. 굳이 역사성이나 기념성을 따지지 않더라도 1시간 정도 불꽃놀이 구경하는 것을 축제라 하기에는 민망한 일이지만, 이 이벤트는 매년 100만 가까운 인파가 몰리는 서울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한국을 ‘축제의 나라’로 만든 다른 축제들의 출현 배경도 별로 다르지 않다. 탈정치적 이벤트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의 이목을 제어하려는 권력의 정치행위는 언제나 있었으나, 그에 ‘축제’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은 광주학살 이듬해인 1981년 ‘국풍 81’부터였다. 당시 정부는 이 ‘국민 대축제’를 브라질의 삼바 축제와 같은 세계적 축제로 발전시키고 국민 통합의 계기로 삼겠다고 공언했지만, 속셈이 너무 뻔해서 ‘국풍 82’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상가 번영회 등이 갓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된 대중의 지갑을 노리고 공동 판촉 행사에 ‘축제’라는 이름을 붙인 건 1987년의 ‘명동축제’가 처음이었던 듯하다. 이 뒤로 재래시장, 전통시장, 종합상가, 전문상가 등이 공동 판촉행사에 축제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이 관행화했다.

축제의 ‘제(祭)’는 인간이 신을 불러 만나는 의식(儀式)을 말한다. 단위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섬기는 신을 불러내어 그와 만나는 접신(接神)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축제다. 인간은 ‘축제하는 동물’이다. 가끔씩 제 몸에서 제 정신을 내보내고 그 자리에 외부의 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습성이다. 집단적이고 동시적인 일상성의 전복은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각 개인의 의식을 정화하고 지루한 일상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는 구실을 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축제’들이 있었다. 일제강점 초기까지만 해도 정월 대보름,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팔월 한가위 등에는 사람들의 흥으로 거리거리 골목골목이 들썩거리곤 했다. 그러나 일본 식민 통치자들은 한반도를 일본 신도(神道)의 축제인 ‘마쓰리’의 땅으로 만들어 버렸고, 한국인들은 축제의 장에서 배제되거나 관객으로 동원되기만 했다. 심지어 마쓰리 행렬을 2층 건물에서 내려다보았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집단 구타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전통과 단절된 상태로 해방을 맞았으니, 해방 이후 수십 년간 한국이 ‘축제 없는 나라’가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며, 근래에 들어 그 결핍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체불명의 축제들이 무수히 생겨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금전만능시대의 축제들이 ‘돈 신’을 찬양하고 영접하며 그 은총을 누리는 행위들로 채워지는 것도 굳이 불평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이 국가권력이나 자본권력이 제공하는 스펙터클을 수동적으로 향유하며 갈채나 보내는 건 축제의 본지에 맞지 않는다. ‘보여주는 자’와 ‘구경하는 자’가 확연히 분리되는 축제는 일방적 동원 체제의 짝일 뿐이다. 축제는 본디 모두가 주역인 동시에 관객으로서 혼연일체를 체험하는 집단적 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축제의 전범을 보인 것은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과 몇 차례의 촛불집회였다고 할 수 있다.

기념성과 집단성과 자발성을 충족하는 시민 주도의 축제들이 자본 주도의 축제들보다 성행할 때, 진정 시민주권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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