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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책과 삶]공공기념물서 엿보는 시민의 집단적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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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기억이다

주경철·민유기 외 지음 |서해문집 | 544쪽 | 2만3000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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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하면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게 되나. <냉정과 열정 사이>에 등장했던 두오모와 베키오 다리? 아니면 메디치 가문의 리카르디 궁전이나 우피치미술관도 있다. 화장품 쇼핑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꿈결 같은 추억을 안겨주는 것은 피렌체의 건축물뿐만이 아니다. 단테는 이곳의 수도원에서 필생의 연인이 된 베아트리체를 처음 보았고 스탕달은 이곳의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조토의 그림 ‘성 프란체스코의 장례식’을 감상하며 쓰러지기 직전의 강렬한 감흥을 받는다. 이 도시를 채운 공기는 마법 같은 사랑과 열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피렌체의 이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 것은 수백년간 이 도시를 휘감았던 정치적 열정의 결과물이다.

물의 도시 암스테르담의 운하 구역은 17세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그 자체가 박물관인 유럽의 다른 도시들이 군주의 위엄이나 종교적 권위를 구현한 산물이라면 암스테르담은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장기간 공들인 도시계획의 결과물이다. 암스테르담은 ‘홍등가’로 유명할 만큼 세계에서 성(性)적으로 가장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도시지만 거리 곳곳의 이름은 ‘주기도문 골목’ ‘수도승 거리’ ‘예수피의 거리’처럼 종교적인 신실함이 묻어난다. 종교적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알려져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으면서다. 15세기까지만 해도 가톨릭 성지로 명성을 날리던 이곳은 16세기 종교개혁 정신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칼뱅교의 거점이 된다. 종교가 강력하게 지배하던 중세를 거치면서도 암스테르담은 자유롭고 개성을 존중하며 논쟁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생존의 기반을 만든 이 도시에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변혁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는 자연히 발생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선 서로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갖고 독특한 도시문화를 형성해 갔다.

경향신문

인류 문명이 등장한 이래로 나타난 도시는 인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활동의 성과물을 집약해 보여주는 공간이다. 각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전승한다. 도시에 있는 크고 작은 공공기념물, 건축물 등은 도시의 역사와 문화경관을 구성하는 요소다. 그 요소는 도시가 기억하는 것,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때문에 이 같은 도시의 산물들을 통해 그 도시의 정체성에 다가가는 것은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다.

이 책은 도시의 각종 기념물과 건축물이 역사를 기억하고 평가하고 전승하는 중요한 매개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역사 연구자 13명의 연구 결과물이다. 3부에 걸쳐 서양의 도시들을 살핀다. 1부에서는 고대와 중세 지중해 권역의 도시인 아테네가 어떻게 공공기념물을 통해 자부심을 강화시켰는지, 고대 지중해를 지배했던 로마의 기념물들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들여다본다. 또 르네상스를 일궜던 피렌체, 신화적 역사를 간직한 베네치아를 추적한다. 2부는 마드리드,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베를린, 뮌헨 등 서유럽의 도시들로 구성된다. 3부는 빈과 모스크바, 뉴욕 등 동유럽과 아메리카 도시를 대상으로 한다. 마지막 장인 뉴욕 9·11 기념물은 유일한 21세기 건축물이다. 테러로 파괴된 자리에 들어선 이 건축물은 탈정치성·탈역사성을 애써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른 도시의 기념물들과는 차별되는데, 그 이면은 마뜩잖은 뒷맛을 남긴다.

저자들은 “도시가 공공기념물을 통해 무엇을 기억하고자 하는지는 시민의 집단적 역사인식 수준을 보여준다”면서 “앞으로 우리 도시에 들어설 공공기념물이나 조형물, 설치작품을 둘러싼 논의에 참고자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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