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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가상공간의 성범죄, 유죄일까 무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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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국 제니퍼 헤일리 희곡 ‘네더’

첨단문명 속 과학윤리를 질문

24일~9월3일 동양예술극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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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네더>의 모리스 역을 맡은 김광덕(서 있는 이)과 심즈 역을 맡은 김종태. 극단 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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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공간의 범죄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29일 결심공판을 앞두고 있는 ‘인천 8살 초등생 유괴·살해 사건’. 가해자로 기소된 두 소녀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캐릭터로 역할놀이를 하는, 일명 ‘자캐 커뮤’라 불리는 에스엔에스(SNS)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던 그들은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가 가려지지는 않았지만, 살해 혐의를 받는 김양은 검찰 조사에서 “내가 여자 역할이고 (공범으로 기소된) 박양이 남자 역할이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해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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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네더> 포스터. 극단 적 제공


박양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커뮤니티 이용자 중에는 자신의 성별이나 연령과는 다른 캐릭터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캐릭터는 일종의 분신이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의 취향이 반영된 창조물일 뿐 캐릭터와 현실의 자아가 반드시 일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다른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온라인은 현실에서 채우지 못한 결핍을 충족할 수 있는 공간 아닌가. 미국의 극작가 제니퍼 헤일리의 희곡 <네더>는 바로 그 온라인 가상공간을 배경으로 해 그곳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다룬 작품이다.

제목의 네더(Nether)는 신비로운 생명체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상, 악마의 세상, 악이나 상상의 영역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 모양이 흡사 앞서 소개한 자캐 커뮤와 유사하다. 첫째로, 네더와 자캐 커뮤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캐 커뮤 이용자처럼 네더 이용자들은 가상공간에서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로 활동하며 익명성을 보호받는다. 심지어 네더는 시각에 더불어 청각, 후각, 촉각까지도 느낄 수 있도록 진화된, 현재의 기술로는 실현되지 않은 최첨단 가상공간이다.

이렇듯 미래 세상을 배경으로 한 <네더>는 에스에프(SF) 연극으로 분류되지만, 전개는 수사극 기법에 따라 이뤄진다. 무대는 취조실. 주된 내용은 네더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 모리스가 피의자 심즈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밝혀내는 진실이다. 심즈는 성공한 사업가인데 강간, 수간, 살인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그는 네더에 은밀한 은신처를 만들어 놓고, 어린아이들과 성관계를 맺으려는 성인들에게 아이와 장소를 제공하는 포주 노릇을 해왔다.

제니퍼 헤일리의 질문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네더>에서 벌어지는 성범죄는 실제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가상 성범죄’다. 그리고 거기서 성행위를 하는 이들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가상세계의 캐릭터다. 어린아이 캐릭터의 주인들은 철저한 신분확인 절차를 거친 성인들이다. 요컨대,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에서 성인들끼리 벌이는 가상의 성범죄인 셈. 그렇다면 이것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이것은 연극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 또한 절박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놓고 모리스와 심즈는 논리적 공방을 펼친다. 심즈가 소아성애자를 양산하여 범죄를 일으켰다는 모리스의 주장에 심즈는 오히려 이러한 충동을 발산하여 정화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반박한다. 심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는 자유로워야만 한다. 적어도 한 곳에서는 완전한 프라이버시를 가져야” 한다며, 자신은 그들에게 상상 속의 자유를 실천할 기회를 제공한 일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작가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취조실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이라 법리적 다툼으로 진행되지만, <네더>가 던지는 질문은 그 이상이다. 고도로 발달하는 문명 속에서 지켜야 할 과학윤리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왜 가상공간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려 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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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네더>의 모리스 역을 맡은 김광덕(서 있는 이)과 도일 역을 맡은 이대연. 극단 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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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모리스 역에는 국립극단 시즌단원 김광덕이, 진실이 드러날 때마다 자신만의 논리로 방어하는 심즈 역에는 김종태가 캐스팅되었다. 중견 배우 이대연은 작품 중반까지 증인인지, 공범인지, 혹은 피해자인지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도일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24일부터 9월3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3관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김일송/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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