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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동서남북] 운동권 정부의 1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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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 용인하는 게 정치인데 文 정부는 "우리만 옳다" 독선

운동권의 이분법 논리 못 벗고 '야당 청산' 프레임에 갇혀버려

조선일보

이동훈 정치부 차장


대학에 입학한 1989년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란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해방 이후부터 건국 과정, 6·25전쟁 등 현대사 주요 장면을 다루는 그 책의 입장은 일관돼 있었다. '해방 이후 남한 정권은 친일 인사들이 수립한 미국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기존 역사 교과서와 180도 다른 시각이 당황스러웠다. 그 책은 '다쓰현' 혹은 '다현사'로 불리며 당대 주사(主思)파 운동권의 현대사 입문서 노릇을 했다.

필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팩트를 따져 그 책 내용의 시비(是非)를 가릴 능력은 없다. 다만 북측·좌익을 선(善)으로, 남측과 우익을 악(惡)으로 일관되게 묘사하는 이분법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세상 일을 어떻게 단순 선악 구도로 양단(兩斷)할 수 있단 말인가. 뒷날 안 사실이지만 그 책의 집필 목적은 운동권 선동·교육이었다. 객관적 역사 성찰은 없고, 당대 운동권들의 시각만 고스란히 담긴 게 당연했다. "우리는 민족·민중의 편이고, 저들은 타도해야 할 친일·친미 독재 세력이다."

운동은 '내가 정의이고 진리'라는 전제 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는 행위다. 그래서 운동가는 세상을 선악으로 나누고 바리케이드 너머 상대를 타협할 수 없는 악으로 간주한다.

주지하듯 문재인 정부는 '운동권(출신) 정부'다. 대통령부터 운동권 대학생에 인권변호사 이력을 가졌다. 청와대는 임종석 비서실장을 비롯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간부 출신이 주축이고, 내각엔 시민단체 출신이 그득하다. 대학 시절 '다현사'를 읽으며 흥분했을 이들이 현 정부 핵심 세력인 셈이다. 운동권 출신이라고 해서 생각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30여 년 세월이 지나며 그들의 생각과 가치도 진화하고 변했을 수 있다. 그런데 스타일이 그대로다.

정치는 경쟁자를 용인해야 한다. 나와 상대가 다른 게 있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대화와 거래로 타협을 모색하는 게 정치다. 운동은 그렇지 않다. 문재인 정부 핵심들은 자유한국당을 대화 상대로조차 여기지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 왔다. 애초 이들을 적폐(積弊)로 낙인 찍었는데 어떻게 대화가 되겠는가.(한국당이 그런 상황을 자초한 측면도 있지만 그건 별개 문제다.)

조선일보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수석 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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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 사람들이 적폐 청산론을 처음 꺼내 들었을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전(前) 정권 핵심만 겨냥한 얘긴 줄 알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세우고 만들어온 한국 보수 전체를 규정하는 용어가 적폐라는 게 정부 출범 이후 여러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국정원과 검찰 중심의 '과거 뒤지기'가 또 시작됐다.

대통령은 '후쿠시마 괴담'을 근거로 탈(脫)원전을 얘기하더니 국회를 우회(迂廻)하는 공론 조사라는 생소한 방식으로 이를 관철하려 한다. 이 정부 핵심 인사는 "국회에서 원전을 다뤄봐야 정쟁밖에 더 하느냐"고 했다. 국회는 타락한 엘리트 기득권자들의 집결지일 뿐 진정한 여론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장관 후보자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야당 의원들을 향해 이 정부 지지자들은 어김없이 문자 폭탄을 퍼부었다. 야당 의원들에게 오는 제보를 '반(反)개혁 음모'라고도 했다.

최근엔 한 기자가 만든 조잡한 명단을 '블랙리스트'라고 흔들어대며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 사장을 서둘러 갈아치우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무조건 비정규직을 없애라고 압박하고,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복지정책의 큰 틀을 바꾸면서도 기존 제도권의 논의와 합의 방식은 외면했다. 숫제 "너희 얘기는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태도다.

문재인 정부가 17일로 출범 100일을 맞는다. 지지율 70%대로 승승장구다. 하지만 화려한 자찬(自讚) 뒤로 "우리만 옳다. 너희는 청산 대상일 뿐이다"는 독선과 오만의 그림자도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이동훈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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