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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이굴기의 꽃산 꽃글]나무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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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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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에서 이끄는 사할린 및 쿠릴 열도 식물 탐사에 참가하였다. 지도에서 한반도와 한 손바닥에 덮이는 곳이긴 해도 좀체 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어깨를 찌르는 조릿대 숲을 헤치며 가는 동안 처음 보는 식물도 많았지만 꿀풀, 금방망이, 해당화 등의 익숙한 것들도 만났다. 헛꽃이 발달한 나무수국은 특히나 반가웠다. 곰이 출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인 나무들의 날씬한 자세를 보는데 이런저런 궁리가 일어났다.

예전 산에 막 다니던 시절, 정상에 서면 조금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산해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걸었던 길을 우러르면 괜히 어깨가 들썩거렸다. 거기까지만 했더라도 마음은 흔감했을 터이다. 산은 사람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것 같다. 산에는 우리가 산이라고 명명한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의 몸에 학력과 이력을 비롯해 게으름, 시기, 질투, 불안이 들끓고 있듯 산에는 많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뒹굴고 있었다. 낙엽과 열매, 벌레와 곤충, 바위와 흙. 그중에서 나무가 꽃과 함께 나를 문득 찾아왔다.

나무 이름 하나 아는 게 대수인가. 이름은 나무의 겉을 대표할 뿐 정작 거룩한 세계는 나무 안에 있다. 거죽을 찢고 나오는 꽃, 그 꽃 안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수술과 암술, 바람에 흩날리는 미세한 꽃가루들, 쟁반 같은 꽃잎과 접시 같은 꽃받침, 동물들의 가죽이나 사타구니에 은밀하게 자라는 것과 흡사한 털과 가시. 예전에는 오밀조밀한 식물의 기관을 보고서도 심드렁했는데 식물을 가까이 하면서 그것들이 그것들로 한 세계를 우아하게 이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꼭대기가 세상의 넓이를 가졌다면 한 그루의 나무에는 세계의 깊이가 응축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귀국하고 출근하면서 꽃들의 근황이 궁금해서 화단부터 먼저 둘러보았다. 활짝 핀 나무수국이 새삼 눈을 찔러왔다. 이 지구는 물의 행성이니 섬뿐만 아니라 실은 대륙도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겠다. 사할린에서 자생하는 나무수국과 내 화단에서 자라는 원예종의 나무수국. 이러니 나는 지금 식물의 품 안을 헤엄치는 중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나무수국, 수국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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