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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위안부 집회 참가 일본인 “'미래지향적 발전' 앞서 사실을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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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후 서울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295회 '수요집회' 참가자 중에는 일본인 남성도 있었다. 그는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 앞쪽에 서서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외치는 소녀들을 보면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행사가 끝난 뒤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91)ㆍ이용수(90)ㆍ길원옥(90) 할머니를 만나 짧은 인사를 나눴다. 수요집회는 일본에 위안부 범죄 인정 등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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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미쓰 아키히로(川?昭?) '오키나와 평화 네트워크' 대표가 지난 9일 서울 중학동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참석해 자신이 직접 쓴 메시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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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본인의 이름은 가와미쓰 아키히로(川?昭?·60)였다.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니 그는 “영어를 못한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가지고 있던 공책을 그에게 건네고 “수요집회에 대한 감상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상의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일본어로 글을 써 내려 갔다. '오키나와에서 왔습니다. 수요집회 참석은 처음입니다. 소녀상도 처음 봤습니다. 집회에서 고교생들의 훌륭한 메시지를 듣고 감동했습니다. 오늘 보고 듣고 배운 것을 토대로 관련한 운동을 해 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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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미쓰 아키히로(川?昭?)가 지난 9일 서울 중학동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5차 세계 위안부 기림일 맞이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해 기자에게 직접 적어준 메시지. '수요시위 참석은 처음입니다. 소녀상도 처음 봤습니다. 시위에서 고교생들의 훌륭한 메시지를 듣고 감동했습니다. 오늘 시위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토대로 관련한 운동을 해 나가고 싶습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하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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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헤어진 뒤 서면 인터뷰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가와미쓰는 자신의 직업이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있는 한 학교 의 관리인이자 출판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오키나와 평화 네트워크’라는 단체의 대표도 맡고 있었다. 이 단체는 현재 일본인 250여 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오키나와 내에서 반전(反戰) 운동, 오키나와 전쟁 유적 보존 등을 하는 곳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오키나와는 2차대전 중 일본 영토에서 지상전(地上戰)이 펼쳐진 곳 중 하나다. 이 전쟁으로 그곳에서 20만 명이 숨졌다. 미군과 일본군 외에 오키나와 주민과 강제동원된 조선인도 희생됐다.

“저는 오키나와에서 조금 떨어진 미야코(宮古)섬에서 태어났어요.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전쟁 중에 일본군에 의한 주민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본격적으로 관련 운동에 관여한 건 1985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걷고, 보고, 생각하는 오키나와』라는 책 출간에 편집자로 참여했을 때부터입니다. 오키나와 내에 있는 전쟁 유적지를 소개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가이드북이었죠.” 그가 말했다.

이후 오키나와 평화 네트워크를 조직해 오키나와 전쟁 문제를 연구한 가와미쓰는 1989년에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배봉기(1914~1991) 할머니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배 할머니는 오키나와에서 강제 추방되지 않기 위해 자신이 1945년 이전에 위안부로 오키나와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1975년에 일본 언론에 증언했다. 1972년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되돌려받은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이전 입국자에 한해 특별영주권을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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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미쓰(오른쪽 첫째)가 대표로 있는 '오키나와 평화 네트워크' 회원들이 학습회를 열고 토론하는 모습. [사진 가와미쓰 아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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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인 박수남 감독이 1989년에 ‘오키나와로부터의 편지-아리랑의 노래’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배 할머니를 인터뷰했어요. 당시에 저는 배 할머니를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한 위원회에 참여했어요. 위안부 피해자와 인연을 맺은 건 그때가 처음입니다. 그 인연으로 1991년에 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유골함을 직접 운구하기도 했어요.”

가와미쓰는 윤정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대표와 재일 오키나와 연구자인 홍윤신씨 등이 2008년에 만든 미야코섬의 아리랑 비(碑)를 보고 위안부 피해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했다. 박 감독의 영화 촬영지인 이 섬에는 수십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 가와미쓰에 따르면 오키나와에는 적어도 140여 개의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들을 영상으로만 접했어요. 한국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 희망을 이루게 됐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을 만났는데, 첫 만남부터 여러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인사만 짧게 나눴습니다. 올해 몇 번 더 한국을 방문해 다시 위안부 피해자 분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전에 한국어부터 배워볼 생각입니다.”

그는 한국과 오키나와는 비극적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쳐 전쟁의 참화를 겪었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그 여파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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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 기념공원에 있는 위령비 '평화의 초석'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희생당한 조선인 이름들이 새겨져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은 없다. [사진 가와미쓰 아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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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 기념공원에 있는 위령비 '평화의 초석'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희생당한 조선인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은 없다. [사진 가와미쓰 아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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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 기념공원에는 ‘평화의 초석’이 있어요. 오키나와 전쟁 때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위령비에요. 여기에는 조선인들의 이름도 있지만, 모두 남성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은 없어요. 앞으로 조사 활동을 이어가 평화의 초석에 그분들의 이름을 꼭 새기고 싶습니다.” 가와쓰미는 이렇게 다짐했다.

그는 이 공원에 소녀상과 관련한 작품을 만들어 세우고 싶다고 했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예술가와 함께 소녀상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만들어 일시적으로라도 전시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흔히 말하는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이라는 것은 서로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선 “잘못됐다”고 잘라말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전쟁 당시 일본 정부와 군에 의한 강제 연행과 성 노예제에 대한 인정,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공식 사죄 및 법적 배상, 재발 방지를 위한 역사 교육 및 추모 사업이 없는 한·일 합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공식 사죄는 일본 국회의 결의에 의한 사과를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일본이 적어도 역사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밝히는 게 우선이겠죠.”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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