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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데스크에서] 그놈의 해방 값 참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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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어수웅 문화부 차장


절판된 '채만식 전집'까지 찾아 읽은 이유가 있다. 국립극단의 연극 '1945'의 대사 한 토막이 계속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놈의 해방 값 참 비싸다."

극본을 쓴 배삼식(47)은 채만식(1902~1950)의 중편 '소년은 자란다'가 그 대사의 출전이라고 했다. 광명과 환희로 가득 찼어야 할 1945년의 독립과 해방을 푸념조로 '비싼 해방'이라니.

배삼식은 광복 한 세대 후에 태어난 1970년생 작가다. 아버지 세대의 진실을 그가 알 수 있을까. '비싼 해방' 당시 채만식의 나이는 43세. '소년은 자란다'를 구태여 뒤진 이유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만주의 전재민(戰災民) 구제소다. 이재민보다 더 못한 처지의 전쟁 유민(流民). 낭보를 듣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을 기다린 건 경성행 기차만이 아니었다. 구제소는 알량한 '기차표 권력'으로 동족을 등쳐 먹는 조선인 최주임과 혼란을 틈타 조선 여인을 능욕하는 중국인들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던 것. 연극과 소설 두 장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비극이 있다. 흙바닥에서 밥 먹는 신세를 탈피해보려고 개다리소반(小盤)이라도 구하러 나갔다가 10여명의 '되놈'들에게 횡액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는 영호 엄마의 비극이다. 채만식은 영호 엄마가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깨물었던 귓불 조각의 새까만 땟국으로 범인들의 국적을 고발한다. 해방된 조국에서 호강을 꿈꿨지만 본전도 못 찾는 해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일보

7월20일 연극 '1945'를 쓴 극작가 배삼식이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앉았다. 배삼식은 "정체성, 기억, 욕망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간이 지닌 여러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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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이런 장면도 등장한다. 해방으로 들뜬 전재민을 선동하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설이다. "노동하는 사람과 농민이 새 조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제 가난과 압제가 없는 세상이 왔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구호는 결국 '솔깃한 말 잔치'로 끝나고, 가난과 압제가 없는 세상은 '비싼 해방 값'을 치르더라도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채만식은 담담하게 묘사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해방'과 '독립'만큼이나 가슴 뛰는 이상과 구호가 넘쳐난다. 좋은 일이다. 문제는 이 정권이 '비싼 해방 값'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르신들 기초연금을 월 30만원으로 올리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도 90만명을 새로 늘리겠다고 한다. 좋은 일인 건 분명하지만 세금이 무려 30조원이 필요한 일이다. 신고리 원전 5·6호기만큼 에너지를 생산하려면 개인 집에 설치하는 지붕 태양광이 무려 529만개 필요하다고 했다. 8·2 부동산 대책도 마찬가지. 투기를 잡겠다는 명분에는 동의하지만, 똑똑하지만 가난한 청년들은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다.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일부를 제외하면 20·30대의 서울 내 집 마련 가능성은 뿌리째 뽑혔다는 것이다. 은행 대출 길이 막힌 상황에서 '평생 월세' 신세라는 자조다.

내일이면 광복 72주년. 해방된 조국에서 호강을 꿈꿨지만, 본전도 못 찾는 해방이 되어버렸다는 채만식의 탄식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다.

[어수웅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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