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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세상읽기]20세기 신세대의 2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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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0년대 초반, 남쪽 지방의 시골 읍내에 거주하는 1971년생 J는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을 꼭 챙겨본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허락해 주말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어린 나이에 “존 포드의 기병대물, 히치콕의 스릴러물, 알랭 들롱 주연의 갱스터물” 등을 섭렵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보며 우리말을 깨우쳤다고 믿는 그의 소원은 “정규방송 종료를 알리는 시그널이 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1985년, 사당역 인근에 거주하는 1972년생 P는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의 중학교에 배정받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한다. 그녀에게 나이키 테니스화와 조다쉬 청바지와 함께 “열 장짜리 버스 회수권”은 “80년대식 청소년”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월말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로 이어지는 “시험의 향연들”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속한 8학군이 또 다른 조건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밀 불법 과외가 그것이다.

1987년, 지방 소도시에 거주하는 1971년생 K는 부모님이 경영하는 ‘80년대식 빵집’이 전성기를 마감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손님들이 “바게트, 피자빵, 야채빵 등 서울에서 전해온 새로운 종류의 빵”을 구비한 최신식 인테리어의 제과점으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조리법을 배워 새로운 빵들을 만들어내지만, 바게트만은 끝내 진열대 위에 올려놓지 못한다. 조리법대로 만들어도 특유의 식감이 살아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다.

거의 유사한 시점, 서울 변두리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던 1971년생 H는 부모 없고 가난한 집의 아이에게 쏟아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헤비메탈을 탈출구로 선택한다. 독일 밴드 악셉트의 ‘메탈 하트’를 처음 들은 이후, 그는 “미쳐버릴 것 같았고, 실제로 헤비메탈 음악에 미쳐버렸다”. 그리고 오랜 벗이었던 ‘마이클 잭슨’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위의 J, P, K, H는 1970년대 초반생 소설가의 단편 소설, 즉 김경욱의 <미림아트시네마>, 정이현의 <비밀과외>, 김연수의 <뉴욕제과점>, 백민석의 <이 친구를 보라>의 주인공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이렇게 상이한 지리적·경제적 배경하에 성장한 이 인물들이 상위 10% 이상의 성적으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1989년의 독일 통일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운동권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1970년대 초반생 일부는 그에 휩쓸렸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3저 호황을 거치며 부모의 소득·자산 증대를 곁에서 지켜본 중산층 출신의 신입생들에게 한국 자본주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선배들은 그리 미더운 존재가 아니었다. 바야흐로 ‘압구정동 오렌지족’과 ‘신세대 문화’에 대한 풍문이 끊임없이 떠돌던 시절이 아니던가.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선배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질문. 그러면 위의 J, P, K, H들은 각각 어떤 모습으로 21세기를 통과하고 있을까? 통계 지표를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두 편의 소설을 참고해보면 어떨까? 신경숙의 1995년 작 <외딴 방>에서 1963년에 태어난 서른둘의 소설가에게 그녀의 1930년대생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넌, 우리들 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더라.” 한편 김애란의 2011년 작 <서른>에선 학원 강사 출신의 1980년대 초반생 주인공이 학원가를 오가는 학생들을 보며 혼자서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자식이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세상’과 ‘젊은 세대의 미래가 바로 앞 세대의 과거와 별 다를 바 없는 세상’. 어쩌면 J, P, K, H는 21세기 내내 후자의 세상을 뒤로한 채 전자의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해 제각각 고군분투하며, 이미 그 세상에 안착한 선배들의 인생 궤적을 뒤따라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작년 겨울, 이들 모두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겠지만 말이다.

<박해천 동양대 교수 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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