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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그 영화 그 음악] 위기서도 기품 잃지 않는… 영국을 닮은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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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에 흐르는 엘가

Q. "무엇이 보입니까?" "조국."

1940년 영불(英佛) 연합군 40만명이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되자, 영국의 어선과 요트, 낚싯배 등 민간 선박들이 무사히 연합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도버 해협을 건넌다. 천신만고 끝에 됭케르크 해안에 도착한 선박들을 바라보던 '사령관'(케네스 브래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 후반 장면이다. 여기서 잔잔하면서도 따스한 관현악 선율이 흐른다. 과연 어떤 음악일까.

조선일보

영화‘덩케르크’에서 해안을 살피는 영국군 사령관‘볼튼’(케네스 브래너).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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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영국의 '국민 작곡가'로 꼽히는 에드워드 엘가(1857~1934)의 '수수께끼 변주곡' 가운데 '님로드(Nimrod)'다. 엘가는 작곡가인 자신과 아내, 지인을 주제로 한 곡씩 선율을 쓴 뒤 곡명으로 영문 이니셜이나 별명을 붙였다. 아내 캐럴라인 앨리스 엘가는 머리글자를 따서 'C.A.E'라고 짓는 방식이다. 이렇게 15곡을 작곡한 뒤 엘가는 '수수께끼 변주곡'이라는 이름으로 모아서 발표했다.

이 가운데 9번째 변주곡인 '님로드'는 작곡가의 친구인 출판업자인 어거스트 재거를 위해서 썼다. 독일어로 그의 성이 '사냥꾼'을 뜻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전설적 사냥꾼의 이름을 붙였다. 작곡을 포기할까 고민하던 엘가에게 재거는 청력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걸작을 쏟아낸 베토벤을 언급하며 격려했다고 한다. 당시 엘가를 위로하면서 재거가 흥얼거렸던 선율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의 유명한 2악장이었다. 엘가는 이 선율에서 착상해 '님로드'의 도입부를 작곡했다.

이 곡은 따뜻하기 그지없는 현악 선율 덕분에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같은 공식 행사와 추모 음악으로도 즐겨 연주된다. 서울시향의 상임 지휘자로 재직했던 러시아의 마르크 에름레르가 2002년 연주회를 앞두고 급작스럽게 타계하자, 당시 악단이 추모곡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인간은 고귀한 희생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낙관적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결코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은 엘가의 선율만큼이나 지극히 영국적이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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