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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어떤 애도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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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이승욱
닛부타의숲·정신분석클리닉 대표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에게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뉴질랜드 원주민들은 ‘마오리’(Maori)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뉴질랜드 원주민들이 마오리라는 이름의 종족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오리라는 말의 뜻은 ‘나는 사람’이다. 그러니 뉴질랜드 원주민들을 마오리‘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다. 인간‘족’이라고 부르는 셈이니 말이다.

이 마오리들은 뉴질랜드 전역에 흩어져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부족 이름을 가지고 산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부족 조상이 멀리 남태평양에서 뉴질랜드로 이주해 올 때 타고 온 배의 이름이다. 그것이 곧 그들 부족의 이름이 된다. 그리고 부족마다 신성시하는 공간이 있는데, ‘마라에’(Marae)라는 부족 공회당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마오리 인사를 나눌 때는 자신의 조상이 어느 배를 타고 왔고, 자신의 마라에는 어디에 있다는 것을 꼭 밝힌다. 우리로 치면 마을회관쯤 되는 기능을 하지만, 전통을 지키려는 마오리 부족들은 마라에를 아주 신성한 공간으로 공경한다. 외부인은 부족의 공식적인 환영 없이는 들어갈 수 없고, 아무 때나 들어갈 수도 없다. 어떤 공간은 외부인은 앉으면 안 되고 공식적인 회의에서는 발언권을 얻기 위해 투쿠투쿠라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야 한다.

이런 신성한 공간에서 부족 회의나 결혼식과 같은 예식도 치러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게 치러지는 행사는 장례식이다. 장례식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망자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다 모여야 한다. 망자의 시신을 가운데 놓고, 하객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망자가 살았을 때 자신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좋았던 일도 얘기하지만, 망자에게 화나고 섭섭했던 일들도 다 얘기한다. 돈 빌려가서 왜 안 갚고 죽었냐는 얘기도 나오고, 심지어 망자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는 모두 면책이 된다. 며칠이 걸리더라도 망자에 대한 각자의 그리움과 원망과 쌓아둔 이야기를 모두 하는, 이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망자의 혼이 제대로 떠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애도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를 보내는 경험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식 기념일 행사에서 한 연설들을 들으며 대통령의 연설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다. 우리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고, 우리가 듣고 싶었던 사과를 하고, 우리가 위로해주고 싶었던 사람들을 안아준다. 왜 오랜 옛날에는 신정일치의 통치 제도를 택했는지가 설핏 이해되기도 한다. 가장 큰 힘을 가진 권력자가 모든 죽음의 해원을 해준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위로가 없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언제 적 제주 4·3이며, 언제 적 광주냐, 언제까지 세월호를 들먹일 거냐며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세월호, 광주항쟁, 제주 4·3, 그 외 수많은 억울한 희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아직 희생자들과 열사들, 무고히 학살된 양민들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자들의 해원을 다 들어야 망자들도 해원할 것이다. 아직도 세월호 아이들 생각을 하면 가끔씩 눈물이 솟구치고, 나 역시 여전히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말을 검열하고 금지하는 정치권력이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기를 바라는 한편,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도 인간 존중의 전통을 지켜내는 ‘마오리’를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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