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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분수대] 소수 정부 그리고 우원식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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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고정애 라이팅에디터


21일 영국 의회에선 1974년 3월 이후 출생자들에겐 낯선 일이 벌어졌다. 개원연설에 해당하는 여왕연설 때다.

흐름은 같았다. 근위병이 의회 지하 저장고를 살폈다. 1605년 의회 폭발 음모에서 비롯된 의식이다. 여왕이 상원회의장에 자리한 후엔 여왕 대리인인 블랙로드(흑장관으로 번역되는데 직역하면 검은 봉으로, 실제로도 검은 봉을 소지한다)가 맞은편 하원회의장으로 가 검은 봉으로 문을 세 차례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들어가 “여왕이 오시랍니다”고 외쳤다. 하원의원들은 그제야 상원회의장으로 건너갔고 여왕의 연설이 시작됐다. 여왕이 실권을 쥔 하원에서 연설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일 수도 있겠다. 의회에 맞서다 1649년 처형된 찰스 1세 이후 국왕의 하원 입장은 금지돼 있다. 하원의 독립성을 상징한다.

그제 달랐던 건 여왕이었다. 통상 황금마차를 타고 의회로 향했고 드레스 차림에 왕관을 쓰고 연설했다. 이번엔 자동차를 이용했으며 ‘평복’ 차림이었다. 왕관은 옆에 두고 모자를 썼다. 이른바 ‘약식’인데 1974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의례만 그때와 유사한 게 아니었다. 당시 에드워드 히스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조기 총선에서 635석 중 297석을 얻었다. 승리가 예견됐음에도 그랬다. 해럴드 윌슨이 이끈 노동당은 301석이었다. 어느 당도 과반을 얻지 못한 ‘헝 의회’였다. 히스가 연정 구성에 실패, 결국 윌슨에 의한 소수 정부가 출범했다. 같은 해 10월 또 총선이 치러졌고 노동당이 과반에서 한 석 많은 319석을 얻어 재집권했다.

1979년까지 집권 노동당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한두 표만 부족해도 정부가 무너질 수 있었다. 병상에 있다가도 투표하러 나와야 했다. 젊은 시절 거친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노동당 의원들이지만 기나긴 대치를 버텨 내는 건 고됐다. 그 기간 13명의 의원이 숨졌다. 수뇌부는 수뇌부대로 야당뿐만 아니라 자당(自黨) 의원들과도 거래해야 했다. 믿었던 의원도 표값을 요구했다. 현실정치의 민낯이었다. “하루하루가 생존투쟁”이란 경험담은 허언이 아니었다. 소수 정부(650석 중 317석)의 수장인 테리사 메이 현 총리의 앞날이 순탄치 않은 이유다.

남 걱정할 일이 아니긴 하다. 의석수로만 보면 더불어민주당(299석 중 120석)이 더하다. 집권당 원내대표가 된 지 한 달인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제가 정말 한 달 동안…”이라며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웰컴 투 레알폴리틱.

고정애 라이팅에디터

고정애 기자 ko.jung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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