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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he-스토리] 한국 온지 17년… 구로동의 '김치 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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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째 매달 복지관 등에 김치 기부… 조선족 출신 사업가 김봉규씨]

처음엔 식당 등 전전, 눈물바람… 6년간 돈 모아 식자재업체 인수

"성실하게 일하면 조선족도 성공" 식당 이모들 응원에 고생 견뎌

2007년부터 거리 청소 등 시작, 밤엔 대림동 순찰 등 봉사활동

19일 오후 2시쯤 서울 구로구 구로2동 화원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 김진용(40)씨가 "올 때가 됐는데…"라며 출입구 쪽을 바라봤다.

이내 트럭 엔진 소리와 함께 "저 왔어요!"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문 열고 들어온 남자 손에는 김치 박스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들과 복지관 직원들이 "우리 동네 '김치 산타'가 오셨구먼" 하며 웃었다.

'한중(韓中)식품'을 운영하는 중국 조선족 출신 사업가 김봉규(38)씨였다. 그는 양꼬치 재료 도매업을 한다. 지난 3년간 매달 복지관에 김치를 대왔다. 이날도 10㎏짜리 김치 10박스를 들여놨다. 김씨는 "한국으로 귀화한 지 12년째"라며 "국적만 바꾸는 게 아니고 진짜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태어난 김씨는 2000년 나이 스물하나에 부모와 함께 한국에 왔다. '한국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외환 위기 여파에서 채 못 벗어난 한국에서 김씨 가족의 '코리안 드림'은 산산조각 났다. 한국말 어눌한 중국 동포를 받아주는 곳은 건설 현장과 식당 주방, 이삿짐센터뿐이었다.

조선일보

서울 구로동에서 ‘김치 산타’로 불리는 중국 조선족 출신 사업가 김봉규(38)씨가 19일 화원종합사회복지관 관계자에게 김치 박스를 전달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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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구 개봉동 보증금 200만원·월세 25만원짜리 쪽방에서 새우잠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 김씨는 "왜 내가 한국에 와서 조선족이라고 차별받고 이 좁은 방에서 살아야 하나 싶어 많이 울었다"며 "부모님께 '혼자라도 중국에 돌아가겠다'고 한 적도 많았다"고 했다.

좌절에 빠졌던 그를 일으킨 게 한국인의 정이었다. 식당에서 만난 주방 '이모'들은 "지금처럼 성실하게 살면 조선족도 성공할 수 있다. 나쁜 길로 빠지지 마라"고 격려했다. 이삿짐센터 동료였던 윤지영(38)씨는 "조선족도 운전면허를 딸 수 있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면허를 딴 김씨는 2004년부터 택배·퀵서비스 배달과 대리기사로 밤낮없이 일하며 한 달에 200만~300만원씩 벌었다. 생활이 안정되자 2005년엔 한국 국적을 땄다. 이듬해엔 6년 모은 2000만원에 3000만원 대출금을 보태 '한중식품'을 인수했다. "동포가 식자재를 납품한다"는 소문을 들은 중국 출신 요리사들이 앞다퉈 주문해줬다.

사업이 자리를 잡자,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조선족은 사건을 많이 일으킨다' '보이스피싱 사기를 친다'는 편견이었다. "아무리 '나도 귀화한 한국 사람'이라고 말해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내 말투만 듣고도 다들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거죠."

한국 사람의 마음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씨는 자신의 마음부터 열기로 했다. 2007년 '중국동포한마음협회'의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매달 셋째 주 일요일마다 요양원·경로당을 찾아 봉사 활동을 펼쳤다. '중국인 때문에 쓰레기가 넘친다'는 가리봉동 거리 미화 활동에도 나섰다. 2009년 '외국인 자율방범대'에 참여해 대림동 일대를 밤마다 순찰했다. 2013년부터는 화원종합사회복지관과 인근 경로당 등에 김치와 쌀 등을 기부해 오고 있다.

요즘 구로·가리봉동에서 봉사 활동을 할 때면 "아우, 왔는가" "형님, 밥은 먹었어요"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진짜 한국 사람이 됐다는 걸 느낄 때"라고 김씨는 말했다. 그는 "제 작은 선행이 많이 알려져서, 한국인들이 중국 동포를 더 예쁘게 봐 준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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