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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문화 현장] 마침 그의 영결식이 거행된 날이었다 / 김일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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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4월은 잔인한 달.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첫 행이다. 애써 시구를 인유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다. 대한민국 4월은 망자를 위한 달이다. 저 멀리 1919년 4·15 제암리 학살부터 1948년 제주4·3항쟁, 1960년 4·19혁명, 그리고 2014년 4·16 세월호 참사까지. 근현대사의 비극들이 그때 벌어졌다.

4월의 끝자락에 그 원혼들을 위한 한판 굿이 시작되었다. 연극 <초혼>이다. <초혼>은 <씻금>과 <오구>에 이어 연희단거리패가 준비한 ‘굿과 연극’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씻금>이 진도, <오구>가 강원·경상 굿에 기초했다면, <초혼>은 제주굿을 토대로 한다. 지역은 달리하나, 망자의 생전 소원이나 원한을 풀고 죄업을 씻어 극락천도하길 기원하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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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초혼>. 연희단거리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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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은 제주굿 중에서도 바다에 빠져 익사한 이들을 위한 요왕맞이 굿을 씨줄로 한다. 요왕맞이 굿은 바다에 빠져 익사한 이들 가운데서도 시신을 찾지 못한 혼령을 위한 제의로, 망자의 혼을 뭍으로 건져 올려 저승으로 천도하길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 바다의 신 요왕(龍王)께 올리는 굿이다. 이 모든 의식은 신을 불러 모시는 초감제로 시작된다.

극장에 들어서면 초감제 준비로 여념 없는 심방을 만날 수 있다. 심방은 신령을 만나는 이를 의미하는 제주도 말이다. <초혼>은 초감제로 시작하여 서우제로 끝이 난다. 심방은 이 모든 굿을 주제하며 공연의 문을 여닫는 주인공으로, 그는 굿을 집전하며 작품의 날줄을 꿴다. 2004년 초연 당시 정공철 심방으로부터 굿을 배운 후, 이번 작품에 심방으로 무대에 선 배우 김미숙은 이제 접신의 경지에 오른 듯싶다. 반무당이 아니라 진짜 무당이 된 듯. 실제로 그는 공연 중 망자의 넋을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씨줄을 꿰는 이는 제주 잠녀인 에미다. 전작 <황혼>(黃昏)에서 <초혼>(招魂)으로, 한자를 떼고 보면 시간을 거스른 듯한 배우 김소희는 이 작품에서 비극의 현대사로 비롯된 비극의 가족사를 가진 에미를 연기한다. 그의 시아비는 일제강점기 사상범으로 몰려 옥사하였다. 남편은 4·3 때 빨치산으로 몰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풀려났지만, 수감생활 중 얻은 폐병으로 병사하였다. 아들은 제주도 골프장 건설 사업에 반대하여 방화를 저질러 연행되었고, 딸은 서울에서 공장살이 하다 절단기에 한쪽 손을 잃고 귀향해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처럼 <초혼>은 굿이라는 우리의 제의를 씨줄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날줄로 하여 한국적 연극의 전범을 직조해냈다. 도드라지게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은연중 세월호가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장된 원혼을 이야기할 때, 그들을 떠올림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고 손준현 기자다.

마침 <초혼>을 관람한 건 그의 영결식이 거행된 날이었다. 말을 전하자 배우들의 눈시울이 금세 불거졌다. 김소희의 눈에선 눈물이 터져 나왔다. 김소희는 “지금 여기, 연극이 할 일과 언론이 할 일에 대해 누구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고 계셨던 분”이라 고인을 회상하며, “무엇보다 연극과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 진한 애정을 잊지 못할 겁니다”라고 애도를 표했다.

이 글이 지면에 실리는 날은 고인이 세상을 뜬 지 7일이 되는 날이다. 글의 갈무리는 공연 중 등장하는,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기리는 서우제의 한 대목으로 대신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시왕문 열리레 갑니데, 제1 진광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2 초강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3 송제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4 오관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5 염라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6 변성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7 태산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8 평등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9 도시 대왕문도 열려줍서, 제10 전륜 대왕문도 열려줍서.”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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